훈구대신의 부패가 악취를 내다 (10)

과인은 유자광이 도총관에 적합함을 열 가지 이유라도 말해줄 수 있다

by 두류산

10장


성종은 유자광의 상소를 읽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붓을 들어 상소의 여백에 답을 써서 승지에게 내려주었다.

“허락할 수 없다!”

성종은 이어서 승지에게 명하였다.

“내일 도총관 유자광더러 무장들의 활쏘기 대회를 개최하도록 하라.”

성종은 대간들이 유자광의 도총관 임명을 두고 반발하니 보란 듯이 유자광에게 주요 행사를 관장하게 했다.


다음날 성종은 후원에 나가 도총관 유자광과 휘하 무장들의 활쏘기 대회를 참관하고 격려하였다. 유자광은 대부분 무장들이 이시애의 난과 여진족 정벌 때 생사를 같이한 동료이며, 병조정랑과 병조참지를 거치면서 잘 지낸 탓으로 무난하게 큰 행사를 주관할 수 있었다.

유자광은 하루에 화살 삼백 발을 쏘면서 갑사 시험을 준비한 이후 활쏘기는 언제나 자신이 있었다. 유자광은 이 날 내금위장과 함께 공동으로 활을 제일 잘 쏜 사람이 되었다. 임금은 도총관 유자광과 내금위장에게 사슴가죽 1장씩을 내려주고, 두 번째로 잘 쏜 부총관과 겸사복장에게 표범가죽으로 만든 깔개 1개씩을 내려 주었다.


사헌부는 임금이 유자광과 도총관 휘하의 무장들을 불러 활쏘기 대회를 개최하며 유자광의 임명을 기정 사실화하는 것을 보고 의논했다.

“이렇게 넘어가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유자광이 도총관이 될 수 없는 이유를 꼽으라면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랍니다.”

“임금이 윤허를 내릴 때까지 멈추지 말고 간(諫)해야 합니다.”


대사헌이 사헌부 관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유자광이 도총관이 될 수 없는 이유를 한 가지씩 말해보라.”

사헌부 대관들이 각각 나서서 말했다.

“우선, 미천한 몸이 발탁되어 금병(禁兵)을 거느리면 사졸(士卒)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한 가지 이유입니다.”

“또 있습니다. 다른 도총관들은 모두 존경과 신뢰를 받는 종친이나 대신들이므로 이들이 유자광을 깔보아 동료가 되기를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다른 대관들도 나섰다.

“귀천의 구분이 뚜렷한데도, 항간에는 서자가 적자(嫡子)를 능멸하는 자가 많아졌습니다. 비록 이를 막는다 해도 오히려 그 무례함을 이길 수 없을까 두려운데, 더욱이 서얼을 주요 관직에 두어서 그 구실을 삼게 하겠습니까?”

“유자광은 안으로 동료들에게 섞이지 못하는 바가 되고 밖으로는 사람들의 인정을 못 받게 되어서, 기가 꺾이고 부끄러워서 하루도 편안치 못할 것입니다.”


김영유가 사헌부 관리들의 의견을 듣고 말했다.

“유자광이 도총관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열 가지는 아니더라도, 다섯 가지는 된다. 지금 논한 것을 취합하여 초안을 만들어보아라. 검토 후 연명하여 상소를 올리도록 하겠다.”


성종은 사헌부에서 올린 다섯 가지 반대 이유를 담은 상소를 읽고 코웃음을 쳤다. 활쏘기 대회 행사 때 유자광은 동료 무장들과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성종은 붓을 들어 상소의 말미에 답을 써서 승지에게 내려주었다.

‘너희들이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자광의 도총관 임명을 막는다면, 과인은 열 가지 이유를 들어서라도 자광이 도총관에 적합함을 말해줄 수 있다. 더구나 이미 선왕 때에 벼슬길을 허통하였는데, 오늘날에 그것을 어찌 막으려고 하는가.”


임금이 들어주지 않자 대사헌 김영유와 사헌부 관리들은 임금에게 나아가 유자광이 도총관이 될 수 없음을 거듭 아뢰었다.

“첩의 아들로서 의정부의 재상이나 도총관을 삼는 것은 이양생과 같이 학문이 부족한 자는 논할 것도 없거니와, 최적은 2년 전에 도총관의 지휘를 받는 위장(衛將)의 직책을 서자라고 맡지 못했으니, 이미 선례가 되었습니다. 최적의 재능이 위장이 될 만한 것이 마치 유자광의 재능이 도총관이 될 만한 것과 같고 그들이 서자인 것도 서로 같으며, 언관이 탄핵한 것도 또한 같은데, 전하께서 전에는 최적을 파직시키면서 오늘날 유자광을 파직하시지 않는 것은 공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양생은 무예에 능하여 군졸이 되었다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토벌군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서얼 출신이고 무식하였기 때문에 자급이 종 2품 가선대부에 이르렀으나 한 번도 중요한 관직에는 등용되지 못하였다. 평생 겸사복으로 있으면서 도성 내외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도적 소탕에 공을 세웠다. 최적(崔適)은 첩의 아들로서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공신이 되었고 글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무식으로 유명했다.


성종은 대관들을 보며 말했다.

“또 도총관 유자광 이야기인 것이오?”

성종은 짐짓 다른 서류를 보며 눈길을 두지 않자 대사헌이 말했다.

“신들은 그윽이 두렵건대, 전하께서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이 점점 예전과 같지 않은가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내리신 명령을 다시 거두어서 명분을 바로잡으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성종은 노기를 감추며 생각했다.

‘대간들이 인사에 지나치게 간섭하면서 이제 과인을 협박까지 하는 것인가......’


성종은 대간들에게 말했다.

"경들은 여러 번 말하나 같은 말이다. 또한 최적을 가지고 말하나 유자광은 최적과는 다르다. 인사권이 임금에게 있어야 옳은가, 대간에게 있어야 옳은가? 경들이 비록 계속 말을 한다 하더라도 끝내 그 청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성종은 대간들을 물러가게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유자광이 문신들의 활쏘기 대회도 개최하라고 하였다. 성종은 승지들과 함께 후원에 나아가서 문신들이 활 쏘는 것을 참관하며 도총관 유자광을 격려하였다.


문신들의 활쏘기 대회는 44명이 두 패로 나누어 성대히 개최되었다. 도총관 유자광은 예문관 전한(典翰) 노공필과 한 편이 되었다. 노공필은 화살 다섯 발 한 순(巡)을 쏜 후 사대에서 내려왔는데 손이 불편한 모습이었다. 유자광이 살피니 활시위를 당길 때 손가락을 다쳐 피가 맺혀있었다. 유자광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을 보호하고 있던 깍지를 빼서 노공필에게 주었다. 노공필은 손가락 깍지를 끼고 큰 불편 없이 활쏘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유자광의 상대편에서는 형조정랑 김언신이 단연히 돋보였다. 김언신은 화살 두 순(巡)인 열 발을 모두 과녁에 적중시켜 임금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의 탄성을 받았다. 유자광은 문신이면서 무인 같이 호방한 김언신의 풍모가 마음에 들었다. 김언신의 활약으로 그의 편이 활쏘기 겨루기에 이겨 임금은 22명 모두에게 활을 내려주고, 이기지 못한 유자광 편에게는 화살을 내려 주었다.


유자광은 문신 활쏘기 대회를 주관하면서 친화력을 발휘하여 문신들과 잘 어울렸다. 김언신과 노공필은 이 날 행사를 계기로 유자광과 친하게 되었고, 노공필의 아버지인 좌찬성 노사신도 아들을 통해 유자광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승지 임사홍은 이날 활쏘기 대회에서 활약하며 문무를 함께 갖춘 것을 드러낸 김언신을 눈여겨보았다. 김언신은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학문이 높아 세조와 대신들 앞에서 경전을 강의하여 유명해졌다. 강의가 끝난 후, 세조가 ‘여러 사람이 모두 능하지 못한데 네가 홀로 능하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고 칭찬한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다.


임사홍은 김언신이 집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가까이 지내기 위해 자신의 집 근처 빈 집이 있는지 수소문하였다. 마침 지방 수령으로 나가는 관리가 집을 세놓았다는 것을 알아내고 김언신에게 소개를 해주었다. 김언신은 새로 구한 집이 규모도 적당하고 위치도 좋아 마음에 들었다.


임사홍은 이를 계기로 김언신의 집에 스스럼없이 들르고 자신의 집에도 김언신을 자주 불러서 어울렸다. 임사홍은 김언신의 어머니가 소갈증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 임원준에게 부탁하여 조제한 약을 받아 김언신에게 주었다. 김언신의 어머니가 그 약을 먹고 차도를 보여 그때부터 김언신은 임사홍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귀를 기울일 정도였다.


사헌부는 상소를 올릴 때마다 임금이 유자광을 도총관으로 임명한 것을 기정 사실화하는 행사를 계속하니 단독으로 계속 간(諫)하기가 어려웠다. 사헌부는 사간원을 찾아 양사가 연명하여 상소를 올리자고 제안했으나 사간원은 장(長)이 최근에 두 번이나 바뀌어 내부적으로 어수선한 상태였다.

대사간 최한정이 이조 참의로 옮기고 후임으로 온 대사간 이약동이 중국 사신으로 가게 되어 열흘 만에 대사간이 두 번 바뀌었다. 이세좌가 대사간으로 새로 부임하였다. 이세좌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손자이며, 전 형조판서 이극감의 장남이었다. 아버지 형제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오자등과(五子登科)’ 집안으로 유명하였다.


대사간 이세좌가 사헌부의 제안에 응하지 않자 사헌부도 더 이상 유자광을 반대하는 힘을 잃어 대간들은 말하는 것을 그쳤다.





(사진 출처)

https://kr.freepik.com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훈구대신의 부패가 악취를 내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