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7년 성종 8년 3월 28일, 임사홍은 본가에 들르라는 부친의 전갈을 받았다. 모래 먼지가 하늘을 덮쳐 하루 종일 도성 전체가 뿌옇게 흐렸는데, 밤이 되어도 공기가 탁해 숨쉬기가 편하지 않았다. 임사홍은 부친의 집을 향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내일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어둠 속의 숲 속을 걷는 심정으로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사랑방에 들어선 아들에게 임원준이 물었다.
“대왕대비가 대신들을 모두 빈청에 모이라고 했다. 심상치 않은 일인 듯한데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말씀드리기 민망하오나, 중궁전에서 비상이 발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필시 이와 관련된 일일 것입니다.”
“비상이라고 했느냐? 독약이 어찌 중궁전에서......”
임원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승전 내관을 추궁하여 얻은 답이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대왕대비가 정승과 판서, 그리고 양사의 장들을 빈청에 불러 모은 것은 왕후의 폐비를 의논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임원준은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중궁(中宮, 왕비의 높임말)은 원자의 생모이시다. 절대로 폐비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중궁전에서 독약이 나온 것이 사실이라면, 왕후의 죄가 너무 큽니다.”
“원자가 자라 임금이 되면, 어머니를 폐비로 만든 신하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임사홍이 한숨을 쉬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혹 폐비가 되더라도, 원자가 임금이 된들 선왕이 결정한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구나 대왕대비와 주상이 결심하여 신하가 따랐는데 어찌 죄를 물을 수가 있겠습니까?”
임원준은 앉은 채로 바짝 아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찌 되었건, 너라도 반대해야 한다. 너의 반대로 왕후가 폐비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훗날 너나 우리 집안의 영화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다.”
임원준은 아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설사 왕후가 폐비가 되어도, 원자가 왕이 되면 반대한 너를 고마워할 것이다.”
성종 8년 3월 29일, 대왕대비의 명으로 정승을 지낸 사람과 의정부의 재상, 육조 판서, 대사헌과 대사간이빈청에 모였다. 빈청(賓廳)은 궁궐 내에 설치한 고관들의 회의실로 승정원 근처에 있었다. 삼정승을 비롯한 정 2품 이상의 주요 고위 관리들이 조회를 기다리며 대기를 하거나, 변란과 국상(國喪) 등 긴급한 일이 있을 때 관계자들이 모여 대책을 의논하던 회의실로 사용되었다.
대비전의 환관이 빈청에서 언문으로 쓴 대왕대비의 글을 펴서 읽었다.
"세상에 오래 살게 되면 보지 않을 일이 없다.”
환관이 읽은 첫마디에 조정의 대신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술렁거렸다.
환관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읽기 시작했다.
“주상이 중궁전에서 보니 종이로써 쥐구멍을 막아 놓았는데, 쥐가 나가자 종이가 보였다. 중궁의 침소에서 작은 상자가 있는 것을 보고 열어 보려고 하자 중궁이 숨겼는데, 열어 보았더니 작은 주머니에 독약과 굿하는 방법을 기술한 책이 있었다. 책에 잘린 부분이 있어 쥐구멍에 있는 종이를 가져다가 맞춰 본즉, 이것은 책이 잘린 나머지 부분이었다.”
빈청에 모인 대신들은 환관이 읽는 내용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라서 주상이 물으니, 중궁이 대답하기를, 궁녀 삼월이가 바친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후궁을 질투하여 제거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부인이 투기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어찌 한나라의 어머니로서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도 이와 같아서야 되겠는가? 이것은 종묘와 사직에 관계되기 때문에 경들을 불러 의논하는 바이다. 중궁이 이미 국모가 되었고 또한 원자가 있는데,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환관이 읽기를 끝내자, 빈청은 신하들의 탄식으로 가득 찼다.
성종은 낯빛이 어두운 채 어전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은 이제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전에도 왕후는 나의 총애를 받고 있다 하여, 소용 정씨와 숙의 엄씨를 모함하여 왕후와 원자를 해하고자 한다고 거짓 편지를 써서 몰래 전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왕후의 모친인 신씨와 나인들이 주변 사람들을 시켜 꾸민 일이라고 드러났기에 망정이지.....'
임금은 무거운 한숨을 뱉어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후궁들을 잡을 뻔하지 않았는가. 그때 용서를 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였건만.....'
임금은 환관에게 어서(御書)를 내렸다. 대전 환관이 빈청에 나와 임금이 내린 글을 읽었다.
"이것은 과인이 능히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지 못한 소치인지라 몹시 부끄럽다. 경들은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의논하라.”
대왕대비에 이어 임금의 말을 전해 듣고 신하들은 근심을 가득한 얼굴빛으로, 서로 돌아보며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영의정 정창손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주상의 뜻은 중궁을 폐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조판서 허종이 나서서 대전 내관에게 임금에게 아뢰고자 하는 말을 전했다.
"옛날에 폐하지 않아야 할 것을 폐하였다가 잘못된 것이 있고, 마땅히 폐해야 할 것을 폐하지 않음으로 해서 잘된 경우도 있었는데, 질투하는 것은 부인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통의 마음입니다. 원자가 장차 장성하게 되면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이런 일을 조정이나 민간에 반포하지 마시고 별궁에 거처하게 하여 2,3년 동안 개과천선함을 기다린 연후에 다시 복위시킴이 옳을 것 같습니다. 만일 개과천선이 안 되면 그때 폐하여도 되는 것이 아닙니까?”
성종은 환관이 전해준 허종의 말을 듣고 답했다.
"판서의 생각은 만일 다른 아들을 낳는다면 원자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큰일을 당했는데 어찌 뒷날을 생각하겠는가? 오늘 일은 종묘와 사직을 위한 것이다.”
법령을 새로 만드는 것을 갑(甲)이라 하는데, 선갑 3일, 후갑 3일은 처음 만든 법령을 반포하기 전후에 과오가 없게 하기 위하여 신중히 검토하여 알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궁궐 밖으로 쫓겨나게 된 왕후를 태우고 나갈 가마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승지 임사홍은 도승지 현석규에게 제안했다.
“승지들이 모두 주상에게 나아가 중궁의 폐위를 다시 생각해 주시도록 호소해야 합니다.”
현석규는 임사홍의 청을 물리쳤다.
“중궁께서 국모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했으니, 주상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
현석규는 장차 왕이 될 원자에게 임사홍이 아부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임사홍은 현석규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승지를 빼고, 좌승지와 다른 승지들을 설득했다.
“지금 중궁을 폐비로 만들어 궁 밖으로 내치는 것을 우리 승지들이 마지막으로 청하여 막아보아야 합니다. 갑자기 왕후를 폐위시켜 원자를 동요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오.”
좌승지 이극기가 말했다.
“임 승지의 말이 옳소. 중궁을 폐위시키고 어떻게 발을 뻗고 잠을 이룰 수가 있겠소.”
도승지 현석규를 뺀 다섯 승지들은 함께 임금에게 나아갔다.
임금이 다섯 승지를 맞이하자, 우승지 임사홍이 아뢰었다.
"지금 중궁이 비록 작은 실수가 있었다 하나 이미 원자를 두어 나라의 근본이 정해졌는데 갑자기 폐위한다 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재삼 숙고하소서.”
좌승지 이극기도 임사홍을 거들었다.
"중궁을 폐위시킨다면 마땅히 종묘에 고해야 할 것이고, 종묘에 고하면 반드시 사방의 백성들이 알게 해야 하는데, 무슨 말로 고해야 하겠습니까?”
임금의 용안이 어두워졌다. 성종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중궁을 미워하여 폐비하는 것이 아니다. 중궁은 한 나라의 어머니로서 나라에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그가 차고 있는 주머니 속에 독약을 감추었으니, 어떻게 함께 종묘를 받들겠는가?”
임사홍이 엎드려 간절히 말했다.
"비록 그러하오나, 혹시 중궁께서 알지 못하고 소인들이 한 짓일 듯하며, 또 비록 알고 있다 하더라도 관련된 아랫사람을 보호하려고 감히 발설하지 못한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장차 원자가 장성하여 어진 덕이 있으면 모후가 폐위되었다고 하여, 어찌 원자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
"뒤에 비록 아들을 두더라도 원자야 어떻게 폐할 수 있겠는가?”
성종은 궁궐에서 어미를 잃을 원자가 눈에 밟혔다. 임사홍은 임금이 원자 이야기가 나오자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모후가 폐위된다면 원자는 능히 보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조 판서의 생각도 이와 같았다. 하지만 큰일을 당하여 어찌 훗날의 일만 생각하겠는가?”
임사홍이 다시 아뢰었다.
"중궁의 춘추가 매우 젊으시므로 비록 작은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뒤에 반드시 고쳐 행하실 것인데, 지금 폐위하면 뒤에 착한 행실이 있어서 지위를 회복하려고 하더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왕후의 칭호를 버리지 말고 별궁에 살게 해서 반성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허물을 뉘우치면 다시 회복하는 것이 무방하고, 만일 허물을 뉘우치지 않으면 그대로 별궁에 머무르게 하면 될 것입니다.”
"지금 너그러이 용서했다가 뒤에 혹 더 크게 잘못하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 이후로부터 부인이 투기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적었습니다.”
동부승지 홍귀달이 나서서 아뢰었다.
"사람이 요순(堯舜)이 아니면 누가 능히 다 어질겠습니까? 투기는 부인에게 보통 있는 감정입니다. 청컨대 장차 큰일을 생각하셔서 적은 허물을 용서하소서.”
임금은 승지들이 간(諫)하는 말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잠시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윽고 승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의 뜻은 경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경들의 말이 지극하니, 재상들을 다시 불러서 하나로 정해진 의논을 취하여 아뢰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