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의 싹이 움트다 (5)

임사홍은 현석규가 임금에게 총애받는 것을 지켜보며 속이 쓰렸다

by 두류산

5장


도성 사람들은 효령대군의 두 손녀사위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한 사람은 임사홍이고 또 한 사람은 현석규였다.

“능력은 현석규가 차석으로 급제하였으니 3등 급제한 임사홍보다는 나은 것이 아닌가?”

“같은 해 과거도 아닌 데 어떻게 그것으로 학문이나 문장의 우열을 논하겠나? 벼슬은 먼저 급제한 현석규가 높은 것은 사실이나, 용모는 곰보자국이 뚜렷한 현석규보다 임사홍이 낫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걸세.”

“현석규는 집안이 미미하나 뛰어난 학문과 문장으로 효령대군의 손녀사위가 되었고, 임사홍은 학문과 문장은 물론, 집안까지 훈구대신 임 대감의 아들이 아닌가. 출발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야.”

임금도 종친의 사위이며 능력도 뛰어난 두 사람을 눈여겨보았다.


현석규는 유생 시절부터 학문이 뛰어났으나 아버지는 지체가 낮은 무인으로 집은 가난하였다. 세종대왕의 형님인 효령대군이 미미한 집안 출신인 현석규를 사람 하나 보고 점찍어 손녀사위로 만들었다. 하지만 임사홍은 달랐다. 소년 급제를 하였고, 부친 임원준은 훈구대신이었다. 궁궐과 종친, 대신들이 모두 임원준의 뛰어난 의술의 혜택을 보아 친하게 지내는 사이니, 그의 아들 임사홍은 어느 집안이나 탐내는 사윗감이었다. 더구나 임사홍은 준수하게 생겼으나 현석규는 곰보자국으로 험상궂은 얼굴이었다. 효령대군은 두 손녀사위 중에 임사홍을 더 사랑하고 각별히 대했다. 당연히 임사홍은 처갓집에서도 기고만장했다. 현석규도 처갓집에 가면 두 사람을 대하는 분위기의 차별을 느꼈다.


현석규는 효령대군이 77세 희수(喜壽)연을 맞았을 때 사건을 떠올렸다. 효령대군의 집은 잔치 분위기로 흥청거렸다. 임금도 종친의 최고 어른의 특별한 생일잔치에 술과 음식을 내리고 궁중 행사에 쓰이는 장막과 차일도 보냈다. 효령대군의 집은 자손들은 물론 축하객들로 붐볐다. 자손들이 술을 올리고 음식을 나누며 잔치의 흥이 무르익을 무렵, 임사홍은 헐레벌떡 늦게 도착하였다. 잔치 상 한가운데 앉은 효령대군에게 달려가 큰 절로 축하를 드리고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들들과 손녀사위들은 물론 손자들도 효령대군과 함께 큰 잔치 상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임사홍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은 것이었다.


임사홍은 음식 장만과 잔치 준비를 지휘하는 사람을 찾아 자신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었다. 그는 임사홍의 화난 기색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말했다.

“비워두었는데 누군가 차지한 듯합니다.”

임사홍이 얼굴을 붉히며 열을 내니, 손자 이심원이 고모부인 임사홍에게 달려가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였다. 임사홍은 잔치 상의 가장자리에 간신히 앉았지만 마음에 차지 않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였다. 이 모습을 지켜본 현석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석규는 사헌부 집의로 있으면서 강개한 진언을 많이 하였다. 특히 훈구대신 오백창과 황효원 등의 부당한 행동을 과감히 탄핵하며 중벌을 내릴 것을 간하였고, 흉년이 들자 경회루 보수공사를 위해 돌을 다듬고 캐는 일을 정지시키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당시 사관들도 현석규를 겁 없이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대간으로 평가하였다. 사헌부가 훈구대신들이 힘을 써서 친지들을 벼슬자리에 앉혔다고 탄핵하였다가 임금과 대왕대비가 이를 주도한 사헌부 대간을 불러 따져 물었더니 겁을 먹어 제대로 답변을 못하였다. 이때 사관은 아쉬워하면서 현석규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제대로 답했을 것이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성종 5년 8월, 임금은 현석규를 좋게 평가하여 동부승지로 발탁하였다.

"경이 형방승지가 되었으니 나를 도와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여라.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으니 형옥(刑獄)보다 큰일이 어디 있겠는가?"

승지들은 6조의 업무를 분담하여 국왕의 자문역할을 하였다. 대개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공조, 동부승지는 형조를 맡았으며 이를 이방, 호방, 예방, 병방, 공방, 형방의 6방 승지라 일컬었다. 형방승지는 대개 옥(獄)에 갇힌 죄수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청인 전옥서(典獄署)를 통솔하는 제조를 겸하였다.


현석규는 부임하자마자 형조와 긴밀히 협조하여 서울과 지방의 옥에 갇힌 죄수들의 현황을 매월 보고받았다. 현석규는 살인과 강도를 저지른 중죄인은 얼마나 되는지, 송사가 지체되지는 않는지를 파악하고 정책에 활용하였다. 성종은 옥에 갇힌 죄수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사정을 수시로 물었는데, 현석규는 즉시 대답을 하여 임금의 신임을 받았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있는 가운데 관청에서 부과되는 가혹한 세금과 형옥의 잘못으로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가 늘어났다. 동부승지 현석규가 이 문제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관청의 잘못으로 억울함을 당한 자는 사헌부에 탄원하여 원통함을 풀고자 하는데, 사헌부가 판결을 오랫동안 미루니 원망이 높은 실정입니다. 이를 시정하여 억울한 사람의 고통을 속히 덜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성종은 그동안 품었던 의문을 말했다.

“백성들의 원통함을 풀어주기 위해 설치한 신문고는 어떻게 폐지되었느냐?”

"세조 때에 신문고를 지키는 의금부 당직자가 밤중이 되어 접근을 막자, 한 백성이 신문고 대신 종각의 종을 함부로 쳐서 소동이 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금지시킨 것이고 별다른 까닭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종은 흥미를 가지고 물었다.

“그런데 왜 신문고를 폐지하게 되었는가?”

“그런 일이 있은 후 순서를 밟지 않고 곧바로 상급 관아에 하소연하는 일을 금지하면서 아울러 신문고도 함부로 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이제 다시 설치하시는 것도 무방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뜻이라면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느냐?”


현석규가 아뢰었다.

“태종께서 신문고를 처음 설치할 당시도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임금에게 호소하거나 사적 원망을 품고 남을 무고할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걱정에도 어떻게 결단을 하셨다 하더냐?”


현석규는 임금의 마음을 헤아렸다.

“태종께서는 신문고를 친 백성이 절차를 뛰어넘었거나, 허위 사실을 고발한 경우에는 처벌하면 되고, 백성들이 임금에게 억울함을 직접 호소할까 봐 관리들이 성심껏 판결할 것이므로 신문고의 존재만으로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결단하셨다고 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처음 신문고를 설치한 뜻을 살펴 이제 다시 북을 치게 허락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은 현석규의 말이 자신의 뜻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였다. 성종은 억울한 백성들이 신문고를 다시 칠 수 있도록 명하였다.

“원통한 사람은 신문고를 쳐서 과인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게 하라. 이렇게 하면, 해당 관리가 미루지 않고 공정하게 판단하게 되어 가슴속에 한을 품은 자가 저절로 줄어들 것이다.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라!”


현석규가 형옥의 일을 살피다가 어전에 들려 임금에게 아뢰었다.

“군현에서 죄수를 월말에 보고하게 하여, 수령이 죄수의 판결을 지체하여 감옥에 오래 가두지 않아 백성들의 원통하고 억울함을 줄어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사로운 원한으로 옥에 가두는 경우에, 간혹 수령이 보고하지 않아, 백성들의 억울함을 다 살피기가 어렵습니다.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어 실정을 조사하여 살피는 것이 어떻게습니까?”


성종이 물었다.

“어사(御使)를 보내고자 함이냐?”

“그렇습니다. 마침 예문관에서 포쇄를 위하여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사고(史庫)에 관리를 보낸다 하니 이들에게 임무를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포쇄는 실록을 점검하여 눅눅한 책을 볕에 말리고 바람에 쏘이던 일을 말했다.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다. 예문관 사관은 지방 수령을 상대하기에는 직급이 낮으니, 직급이 높은 사람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 포쇄를 하는 데, 예문관의 사관만 파견할 수 있고 홍문관의 겸임 사관은 파견할 수 없는 것인가?”

“대개 예문관의 사관인 한림(翰林)을 파견하였으나 홍문관에서 사관을 겸임하는 자도 파견할 수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예문관은 전임관(專任官)으로 정 7품 봉교, 정 8품 대교, 정 9품 검열의 사관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고위 직책은 겸직으로 대개 홍문관의 관원이 겸하고 있었다.


성종은 충주와 전주, 성주의 사고로 내려가서 실록의 보존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최한정, 유순과 이명숭 세 사람에게 밀지를 주며 삼남(三南)의 형옥실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들이 다녀온 후 수령들의 보고가 정확해졌고, 수령의 사사로운 원한으로 옥에 갇히거나, 죄수가 오랫동안 옥에 방치되는 일도 줄어들었다. 백성들의 괴로움과 원망도 이에 따라 감소하였다.

성종은 곰보자국으로 다소 험상궂은 생김새와 달리 백성들을 위해 세심한 마음을 쓰는 현석규를 귀하게 여겼다.


성종은 현석규를 우승지로 승진시키면서, 공석이 된 동부승지 자리에 효령대군의 또 다른 손녀사위인 임사홍을 발탁했다. 임사홍은 한명회 탄핵사건으로 사헌부 전체가 좌천될 때 사헌부 집의에서 성균관 사예로 자리를 옮겼다. 성종은 임사홍을 좋게 보아 곧이어 예문관 부제학 겸 경연관으로 임명하였다가, 이번에 승지로 낙점한 것이었다.


성종은 승지가 되어 첫날 등청한 임사홍에게 당부했다.

“형옥보다 큰일은 없다. 그동안 현석규가 동부승지를 하여 과인은 늘 안심이 되었다. 죄 없는 자를 살리는 일이니 부지런히 살펴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임사홍이 어전에서 물러나와 현석규를 찾았다.

“저와 형님은 인척 간인데 함께 승지로 일하게 되어 광영입니다. 승정원에서도 형님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현석규는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임사홍과 함께 근무하게 되어 불편한 마음이었다.

‘효령대군의 두 손녀사위가 모두 승지가 되었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겠군.’

현석규는 임사홍에게 눈길을 잠깐 주었다가 다시 서류를 보며 말했다.

“관청에서는 사사로운 인연을 따지지 않는 것이 좋겠소. 서로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합시다.”

임사홍은 현석규가 냉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건조하게 대하자 자존심이 상했다.


1475년 성종 6년 여름, 세상이 불가마속에 있는 것처럼 견디기 어려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성종은 날씨가 찌는 듯이 무더워지자 옥에 갇힌 죄수가 걱정이 되었다. 어려움은 없는지 신임 동부승지인 임사홍에게 물었다. 임사홍은 서울과 지방에 있는 죄수들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즉시 답을 못했다. 임사홍이 다음날 급히 자료를 취합하여 임금에게 아뢰었으나 성종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맹렬한 무더위와 함께 가뭄이 오래 지속되자, 임금은 현석규를 불러 형옥의 일을 계속 맡아달라고 당부했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으니 정사를 하는 데에는 형옥(刑獄) 보다 큰일이 어디 있겠는가? 경이 형방승지를 맡고 나서는 전국의 송사가 지체된 바가 없었고 원통함을 호소하는 백성들도 현저히 줄었으니 앞으로 계속 맡아주었으면 한다.”


성종 7년 3월, 도승지 유지(柳輊)를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 보내면서, 현석규를 도승지로 삼고, 임사홍을 좌부승지로 승진 임명하였다. 임금은 현석규가 도승지로 승진하여도 형방승지 일을 놓지 않게 했다. 임금은 현석규가 형옥을 다시 담당해주어 옥에 갇힌 죄수에 대한 시름을 덜 수 있었다.

임금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나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에는 반드시 옥에서 고생하고 있을 죄수들의 동정을 챙겼다. 임사홍은 어전에서 현석규가 임금이 궁금해하는 점을 소상히 대답하는 것을 지켜볼 때마다 속이 쓰렸다.





(사진 출처)

https://kr.freepik.com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간신의 싹이 움트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