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은 사돈인 노공유의 형인 노공필의 집을 찾았다. 노공필과 노공유는 정승 노사신의 아들이었다. 노사신과 임원준은 훈구대신으로 서로 왕래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아들들도 친하게 지냈다. 임사홍은 노공유의 아들을 사위로 맞았고, 어릴 때부터 친구이던 노공필과는 사돈지간의 인척이 되었다.
임사홍은 노공필의 사랑에 들어와 앉자마자 현석규를 욕하였다. 노공필도 동생의 처남인 송호를 옥에서 빼내려는 승지들의 노력이 현석규 때문에 틀어져서 그에 대한 원망이 깊었다.
노공필은 임사홍을 위로하며 말했다.
"이웃에 있는 김언신과 박효원도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며 현석규 욕이나 실컷 하세.”
노공필이 사람을 시켜 호조 정랑 김언신과 사간(司諫) 박효원을 불렀다. 친하게 지내던 네 사람이 술상을 앞에 놓고 앉으니, 임사홍이 먼저 현석규를 비난하였다.
"주상께서 홍귀달이 송호와 조식이 무고죄가 아니라고 아뢴 것에 대해 물으시니, 현석규가 갑자기 노하여 소매를 걷어 올리고 홍귀달에게 ‘너’라고 부르며 욕까지 하였네. 현석규는 같은 품계의 승지들을 아전 대하듯 다루니 내가 그를 싫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조 정랑 김언신이 임사홍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현석규는 당연히 예(禮)를 갖추어 홍귀달을 나무라야 하거늘, 동료들에게 예의와 겸양을 찾아볼 수 없는 죄는 홍귀달보다 크다고 할 수 있네.”
김언신이 기개 넘치게 현석규를 비난하자, 박효원이 맞장구를 쳤다.
“도승지가 같은 품계인 다른 승지를 욕하는 것은 실로 해서는 안 될 일이야.”
임사홍은 박효원을 보며 생각했다. 박효원은 형제와 같은 사이였다. 아버지 임원준은 박효원을 집에서 숙식을 시키며 과거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박효원은 가신(家臣)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임사홍은 간관인 박효원을 부추겼다.
“현석규의 잘못을 탄핵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일은 대간들의 할 일이 아닌가. 사간원은 왜 제대로 말하지 않는 것인가?”
“문제는 대사간이야. 손비장은 매사 지나치게 신중하니......”
임사홍은 박효원의 말을 듣고, 술자리가 파하자마자 곧바로 대사간 손비장의 집을 찾았다. 손비장이 불쑥 찾아온 임사홍에게 인사하며 물었다.
“대사간께서 부임하시어 아직 제대로 축하도 못 드렸는데, 우리 승정원을 향해 쓴소리를 하셔서 부끄럽기도 하고 불편한 마음이어서 찾아왔습니다.”
“승정원은 백관들이 모두 보는 곳인데, 동료끼리 불화(不和)한다고 하니 듣기에 민망했습니다.”
임사홍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현석규가 임금 앞에서 무례하게 홍귀달을 욕한 일을 슬며시 털어놓았다. 손비장은 자세한 내용을 듣고 말했다.
“홍귀달이 비록 서열을 뛰어넘어 아뢰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내막을 듣고 보니 현석규의 행동은 더 큰 잘못입니다.”
술상이 들어오자, 임사홍은 밤늦도록 손비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조정의 기풍을 흐린 도승지를 사간원이 담대하게 탄핵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박효원은 대사간과 동료 간관(諫官)들이 모인 자리에서 현석규가 임금 앞에서 승지에게 거칠게 말한 것을 상세히 이야기하였다.
“현석규의 행동거지가 예의에 크게 어긋나 있으니, 사간원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간원 대간들도 현석규의 무례함에 분개하였다. 박효원은 대사간을 보며 말했다.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도승지가 예의와 겸손을 모르면 조정의 기풍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간원이 모른 체해서는 안될듯합니다.”
정언 김맹성은 사간(司諫) 박효원의 말이 어딘가 허술하게 들렸다. 사간원은 대사간, 사간, 헌납, 정언으로 계급이 나누어지니 김맹성은 상관인 박효원에게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이 말의 근거를 명백하게 말할 수 없으면 사간께서 오히려 그 허물을 뒤집어쓸 수 있습니다.”
박효원은 김맹성의 경고에 짐짓 시원하게 대답했다.
“허물이 있으면 마땅히 내가 달게 받겠소.”
대사간 손비장은 이미 들은 바가 있어 출처가 어디인지 묻지 않고, 김맹성에게 지시했다.
“김 정언은 우리 중에 문장이 제일이니 상소의 초안을 잡아 주시오.”
성종 8년 7월 17일, 도승지 현석규는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미리 보았다.
"신들이 듣건대, 홍귀달이 조식의 일을 가지고 보고 드린 뒤에 전하께서 물으시자, 도승지 현석규가 갑자기 노하여 소매를 걷어 올리고 홍귀달의 이름을 부르며, ‘너’라고 일컬어 욕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현석규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임금과 승지들의 은밀한 일을 어찌 대간이 알고 있단 말인가?’
현석규는 승지들 중에서 누군가 간관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상세히 누설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현석규는 임사홍이 의심스러웠다.
‘간관에게 누설한 자가 누구일까? 승정원의 주서나 사관이 아니라면, 임사홍일 것이야!’
현석규는 임사홍을 불러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임금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임사홍은 상소 내용을 빠르게 훑고는 현석규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곧바로 상소를 들고 어전에 나아갔다. 현석규는 임사홍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임사홍에겐 사간원의 상소가 전혀 놀랍지가 않은가 보군.’
임금은 임사홍이 가져온 사간원이 연명하여 올린 상소를 펼쳐 읽었다.
“신들이 생각하건대 홍귀달은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현석규가 나무란 것은 진실로 옳습니다. 하지만 현석규는 예(禮)로써 나무라지 아니하고, 이름을 부르고 너라고 일컬어 동료를 하급 벼슬아치와 같이 대했습니다. 당상관이 당하관을 대하더라도 이와 같이 하지 않거늘, 더구나 같은 서열의 승지들끼리는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옵니다. 현석규가 후설(喉舌, 승지)의 장(長)으로서 예를 갖추지 않고, 같은 품계의 승지들을 대우하기를 이와 같이 함이 옳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아울러 현석규도 죄를 물어 주시옵소서”
임금은 대간들의 상소에 놀랐다. 대간들이 처음에는 홍귀달과 승지들이 도승지가 없는 틈을 타서 순서를 뛰어넘어 임금께 아뢴 것을 탄핵하였는데 이번에는 도승지를 탄핵하자 전혀 뜻밖이었다. 도승지 유지가 대간의 탄핵으로 결국 외직으로 나갔는데, 그를 이어받은 도승지가 또 대간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어 당혹스러웠다. 임금과 승지들 사이의 은밀한 일들을 대간들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도 괴이한 일이었다.
임금은 상소를 내리며 임사홍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일을 간관들은 어떻게 알고 말하는 것인가?”
임금은 승지들이나 사관을 염두에 두었다. 임사홍이 답을 못하자, 임금은 도승지를 불렀다.
현석규가 어전에 입시하여 비통한 목소리로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臣)이 상소를 보니, 마음이 아파서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승지들끼리의 은밀한 일을 어떻게 간관들이 알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臣)은 홍귀달에게 너라고 일컬어서 욕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은 본시 마음이 너그럽습니다. 이번에 승지들이 순서를 건너뛰어 말한 것도 신의 품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신인손이 도승지가 되어, 동료 승지들을 거만하게 꾸짖고, 승정원 주서를 구타까지 하였습니다. 신은 이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과인도 어전에서 있었던 내밀한 일을 사간원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사간원에서 상소의 초안을 작성한 간관을 들게 하라.”
사간원 정언 김맹성이 부름을 받고 급히 어전에 입시하였다. 임금이 물었다.
"상소에서 쓴 이 일은 누구에게 들었는가?”
"조정에서 이 일을 가지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데, 누가 듣지 못하겠습니까? 예로부터 대간이 논하는 것은 일찍이 그 출처를 묻지 않았습니다. 만약 물으시면 신(臣)은 언로(言路)가 막힐까 두렵습니다.”
성종은 김맹성이 단호하고 의연한 태도로 아뢰자, 더 이상 윽박질러 캐묻지 않았다. 임금은 오히려 그날의 사실을 파악할 수 있도록 승정원이 김맹성에게 제대로 설명을 해주도록 명했다.
임금의 명에 따라 김맹성이 승지들에게 그날의 일을 물으니 임사홍이 상소의 내용을 인정하며 말했다.
"그날에 도승지가 홍귀달 보고 ‘강맹경이 도승지가 되고, 신숙주가 동부승지가 되었더라도 이와 같이는 못하였을 것이다. 홍귀달 때에 어찌 승정원의 고풍이 변하였는가?’라고 하는 것을 들었소.”
임사홍이 상소 내용을 사실인 듯 말하자, 현석규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간관들에게 누설한 자가 임사홍 임에 틀림없다!’
현석규는 임사홍을 한번 노려보고 김맹성에게 변명했다.
"홍귀달이 순서를 뛰어넘어 주상께 말한 까닭으로 노한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소매를 걷어 올린 것은 그 일과 무관하게 더위로 인하여 팔뚝을 드러내었을 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