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은 승정원에서 짐을 싸며 낙심하였다. 도승지를 쫓아내려다가 오히려 자신이 승정원에서 나오게 되어 마음이 무거웠다. 임금이 가장 총애하고 가까이 여기는 두 사람 중에 현석규의 신임이 더 큰 것임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임사홍은 내심 웃고 있을 현석규를 생각하니,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날 밤하늘에서 우르릉 꽝꽝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내리쳤다. 임사홍은 문을 열어 가을비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 하늘에 천둥과 벼락이라니. 하늘도 오늘의 인사가 잘못되었다고 꾸짖는 것인가.”
며칠 후, 성종은 대사간 손비장을 대사헌으로 영전시키고, 임사홍을 대사간으로 임명하였다. 임사홍은 임금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여 간관의 장(長)으로 발탁해주어 감동하였다. 하지만 붓을 들어 대사간 직책을 사양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은 불초(不肖)한 몸으로 근간에 여러 번 대간들이 거론하여 주상전하께 심려를 끼치게 하였으니 마땅히 폐출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뜻하지 않게 주상께서 넓은 도량으로 허물을 숨겨주시고 다시 귀한 자리를 주셨으니 자상한 아비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전일에 노공필에게 경솔하게 발설해서 죄를 얻었습니다. 현석규가 신에게 의도한 바가 있다고 의심을 하였을 때, 신은 마땅히 허물을 인정하고 말없이 가만히 있어야 되는데, 성품이 편협하여 경위를 밝히려고 해서 마침내 외부에까지 알려지게 되고, 대간에게까지 들리게 하였으니, 신에게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성종은 임사홍이 올린 상소를 읽다가, 현석규를 불러서 소리 내어 읽어보게 하였다. 이는 효령대군의 손녀사위들인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함이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도, 승정원에서 불화의 틈을 만든 것은 모두 신의 잘못입니다. 신이 만약 전하의 총애를 탐해서 신의 죄과를 알지 못하고, 대사간에 임명되어 영광으로만 알고 뻔뻔스럽게 직책에 나아가는 것은, 진실로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라옵건대, 신의 직책을 파(罷)하셔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임금은 현석규가 상소를 읽는 것을 들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성종은 붓을 들어, 상소의 말미에 비답을 써주었다.
"경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의 성품은 사간원에 적당하니, 피하지 말라.”
현석규는 임사홍이 임금에게 잘못을 인정하였으니, 이것으로 이번 일이 마무리된 것으로 생각했다.
이심원은 사간원에 들리어 고모부 임사홍의 대사간 승진을 축하하고, 따로 김맹성을 찾았다. 이심원이 반갑게 인사하는 김맹성에게 농을 했다.
“사간원은 현석규를 공격하는 일 말고, 다른 업무는 안 하십니까? 현석규가 큰 할아버지 서원군의 사위라서 제가 가끔 보는데, 비록 직설적이고 행동이 거칠어서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김맹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현석규가 비록 노할 만했다고 하더라도 어찌 동료를 너라고 일컬으며, 동료의 이름을 불러서 낮게 대우하고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하급관료라도 해서는 안 될 일인데 주상을 모시는 승지의 장(長)이니 비록 실수라고 하더라도 조정의 기풍을 망치는 자라고 비난을 받을만했네.”
이심원이 말했다.
“도승지가 아래 승지에게 이름을 함부로 불러 예의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이 술자리에 앉아서 풀면 될 것을 어찌 조정을 이토록 어지럽게 한단 말입니까?”
“주자가 ‘존천리 멸인욕(存天理, 滅人欲)’이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사람의 감정과 욕구는 다스릴 수 있어야 진정한 군자라고 할 수 있네. 또한 부드러움이 능히 굳셈을 제압한다는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동료를 겁박하여 억누른다고 제압이 되고 승정원의 화목을 이룰 수 있겠는가?”
“군자가 아닌 사람을 승정원에 둘 수 없다고 공격하면, 군자가 조정에 얼마나 있다고 육방 승지를 다 채우겠습니까?”
김맹성은 이심원의 말에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로 다투었던 승지가 대사간으로 왔으니, 대놓고 도승지를 공격할 수 있겠는가? 현석규 공격은 더 이상 없을 것일세. 자네 말대로 사간원도 다른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이심원과 김맹성은 서로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유자광은 도총관으로 궁궐에 숙직하던 날에 내병조에서 당직을 서던 병조참의 노공필을 만났다. 유자광이 반갑게 인사하며 안부를 묻자, 노공필은 현석규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현석규 때문에 사돈집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부자의 의리로 찾아가서 아들을 구제해달라고 부탁한 것을 안 들어주면 그만이지 혼자서 곧은 체하려고 옥에 가두게 한단 말입니까?”
유자광은 노공필을 위로하며 물었다.
“현석규와 임사홍은 서로 분한 마음을 품고 다툰 것은 조정이 다 아는데, 왜 임사홍만 승정원을 떠나고 현석규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오?”
노공필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모두 현석규를 그르다고 하는데 주상만 현석규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주상께서 현석규에게 속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주상께서 현석규만 감싸고, 대간의 말은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주상을 가까이 모시는 현석규가 전하의 총명을 흐리게 하는 소인이라 그렇습니다.”
“아니, 그런 자가 어찌 전하의 곁에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유자광은 애가 타고 안타까웠다. 노공필과 헤어진 후, 도승지 현석규가 실로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유자광은 궁궐에서 당직을 교대하기 위해 도총부에 온 도총관 허종에게 현석규에 대해 아는지 물었다. 허종은 현석규를 유생 시절부터 아는 사이라고 했다.
“나의 숙부가 장예원(掌隷院)의 사의(司議)로 노비 관련 송사를 다루는 일을 맡았을 때 현석규는 형방승지였소. 그때 현석규가 노비 송사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압력을 행사했다고 분개하였소. 숙부는 그 일로 현석규를 하찮게 여긴다고 하였소.”
장예원은 조선시대 노비의 문서와 노비를 둘러싼 소송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이었다. 사의(司議)는 장예원의 정 5품 관리였다.
유자광이 물었다.
“현석규가 강직하다고 하던데, 노비 소송을 관할하는 형방승지가 되어 청탁을 했다는 말이오?”
“청탁을 했는지, 노비 소송에 훈수를 두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그런 일로 숙부가 그를 싫어하는 것은 분명하오.”
“이번 승정원의 일은 어떻게 보고 계시오?”
“내가 본래 오래전부터 현석규와 알고 지내면서 행동이 거칠고 모가 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승정원의 일을 들으니, 과연 그 사람됨을 알겠소.”
유자광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도승지가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하니 탄식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번 일에 연루된 승지가 모두 승정원을 떠났는데, 현석규만이 주상 곁을 지킨다니.....”
유자광의 탄식에 허종은 말을 더했다.
“전하는 대간의 말을 받아들이기에 지극히 너그러웠소. 하지만 지금 도승지 현석규의 일에 대해서는 대간의 말을 믿지 않고, 단호하게 대간의 청을 거절하고 계시오.”
유자광은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만일 현석규가 전하로 하여금 간언을 거절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라면, 현석규가 조정의 기풍을 무너뜨린 죄는 오히려 가볍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