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자 사관 제도가 도입될 뻔하였다
여자 사관인 여사(女史)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있었다. ‘신입 사관 구해령’이다. 조선 시대 양반가의 딸인 구해령이 사관을 뽑는 시험에 당당히 합격해 예문관의 여자 사관이 된다는 독특한 소재로 드라마는 인기를 끌었다.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은 사관들에 의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는다. 하지만 편전에서 업무를 마치고 물러나 궁궐 깊은 곳으로 간다면 남자 사관은 따라가지 못하고 덩달아 기록도 멈추게 된다. 하지만 정치는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이루어진다. 정치는 왕과 신하들의 논의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왕과 왕비나 대비, 혹은 후궁과의 상호작용도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중국은 주나라 이후 송나라 등의 왕조에서 밤에 왕이 머무는 내전(內殿)에서의 행동이나 대화를 기록하기 위해 여자 사관제도를 두었다.
여자 사관 제도를 도입하면 궁궐 깊숙한 곳에서 왕이 왕비나 대비, 심지어 후궁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내관 등에게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도 역사에 남을 것이다. 왕의 사생활이 모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왕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제도일 것이나, 보다 투명한 정치는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도 여자 사관제도가 도입될 뻔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지 120여 년이 지난 중종 시절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중종은 연산군을 폐위하고 즉위한 왕이었다. 조광조 등을 중심으로 한 사림들은 임금을 모범적인 군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경연을 통해 왕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왕도정치 이념에 입각하여 과감하게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다.
1520년, 중종 14년 4월 22일 아침 경연인 조강이 열렸다. 임금이 경연관들에게 역사 강의를 듣는 자리에서 신하들은 새로운 제도 도입을 주장하였다. 신하들은 《속강목(續綱目)》에 담긴 중국 송나라 역사를 강의하면서 조선도 여자 사관을 두어 내전에서 왕의 언행을 모두 기록해야 한다고 제안을 올렸다.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이날 경연에서 조광조와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정 2품 의정부 우참찬 김안국이 아뢰었다.
"여기에 북송의 황제 신종과 태후(황제의 어머니)가 말한 일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는 규문(閨門, 부녀자들이 거처하는 곳) 안의 말이라 사관으로서는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여자 사관이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김안국은 말을 이었다.
“예로부터 여자 사관은 규문 안에서 임금의 거동과 언행을 모두 다 기록하므로 외인(外人)이 그 일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역사책에 기록하여 놓음으로써 뒷사람이 그것을 보고 선악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깊은 궁궐 안의 일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은 여자 사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사(女史)가 없는데, 규문 안 내전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을 어떻게 자세히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옛 관례에 따라 여자 사관을 두어 그로 하여금 임금의 동정(動靜)과 말한 바를 기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의 문인으로 학문 수준이 높고 도학에 통달하여 사림파를 이끌며 제도 개혁을 선도했다.
조광조의 제자이기도 한 정 4품 사헌부 장령 기준(奇遵)이 김안국의 제안을 거들었다.
"합당한 말입니다. 임금은 깊은 궁궐 속에 거처하므로 그 하는 일을 바깥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자 사관을 두어 그 선악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비록 깊숙한 궁궐 속의 혼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에서도 감히 방만하지 못했던 것이니, 모름지기 옛 제도에 따라 여자 사관을 두는 것이 옳습니다.”
김안국과 기준이 말한 옛 제도는 중국 주나라 왕실의 관직제도인 <주례(周禮)>에 기록된 여사(女史)라는 관직을 말했다. <주례>는 왕후의 명령 등을 기록하기 위해 여자 사관을 둔다고 하였다.
중종은 당황해하며 신하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모두 글을 지을 줄 알았으므로 올바른 여자 사관을 얻어서 대궐 안의 일을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하도록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글에 능한 여자가 아마도 적은 것 같으니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을 얻기가 어려울 것 같다.”
김안국은 임금의 말에 반박하며 아뢰었다.
"여자 사관은 반드시 글에 능해야만 될 수 있는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문자를 조금 해득할 수 있다면 깊은 궁궐 속의 일을 보는 대로 기록하여, 후세의 왕과 현인들로 하여금 선왕(先王)은 깊은 궁궐 안 혼자 있는 곳에서도 잘못하는 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권징(勸懲,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하는 바가 클 것입니다.”
임금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김안국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을 더했다.
“밖에서는 좌우에 시종(侍從, 승지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원 등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과 사관이 있으면서도 안에는 여자 사관이 없으니,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큰 흠결입니다. 깊은 궁궐 안 내전에서의 일에 대하여 후세의 자손들이 어떠하였는지를 모르게 하는 것은 매우 불가합니다.”
중종은 김안국의 논리적인 반박에 마땅히 대답할 말을 잃었다. 이때 경연에서 왕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일을 맡은 정 4품 시강관(侍講官) 이청이 나서서 임금의 우려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아뢰었다.
"이른바 언문(諺文, 한글)으로 기록해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어찌 한문으로만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중종실록, 재위 14년 4월 22일)
중종은 지금의 결정이 자신은 물론, 앞으로의 왕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임을 자각했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