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은 여자 사관 도입에 대한 거부감으로 신하들의 제안을 반대했다. 임금은 여사(女史)의 자격 문제를 거론하며 에둘러 말했다.
"여자 사관의 직임은 선한 일과 악한 일을 기록하는 것이니, 반드시 마음이 올바른 여자를 얻는 뒤에라야 가하다. 뿐만 아니라 사관도 모름지기 정직한 사람을 가려야 한다. 사필(史筆)을 잡는 것은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강관 이청이 물러서지 않고 아뢰었다.
"여자 사관의 직무는 예문관 사관과 차이가 있습니다. 사관은 조정 신하들의 의논한 바를 기록하고, 무엇이 옳고 그르며 착하고 악한지를 판단하여 만세(萬世)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 직무이고, 여사는 규중 안에서의 임금의 일상생활을 기록하는 것뿐입니다."
중종은 신하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자, 다른 문제로 화제를 돌리며 피해나갔다. 중종은 뜬금없이 대신들을 나무랐다.
"어진 이를 천거하는 것이 대신의 직임인데, 근일 대신들이 어진이 천거하는 도리에 있어 미진한 것 같다......" (중종실록, 재위 14년 4월 22일)
임금이 말머리를 돌려 궁한 입장을 피해나가자, 신하들은 여자 사관 제도 도입에 대해 더 이상 말하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전 공조좌랑 심의(沈義)가 관제와 관복의 개혁 등 7가지 제도 개혁을 주장하면서 여자 사관제도를 둘 것을 진언하는 등 새로운 제도를 신설하자는 주장은 계속되었으나 중종은 긍정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 (중종실록, 재위 14년 8월 15일)
3개월 뒤, 중종 14년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중종은 천하의 인심이 대사헌 조광조를 지지하니 조광조는 공신들을 제거한 후에 스스로 임금 될 꿈을 꾸고 있다는 공신 세력들의 모함을 믿고 한 밤중에 조광조 일파를 모두 잡아들였다. 그동안 개혁의 주창자인 조광조가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게 되고, 기준은 죽고 개혁의 동조자 김안국과 이청은 파직되었다. 연산군 시절에 벌어진 무오, 갑자년에 이어 선비들이 화를 당한 세 번째 사건으로 역사에서는 이를 기묘사화로 부른다.
기묘사화로 사림이 몰락하고 공신 세력이 득세하면서 제도개혁과 변화는 모두 멈추고 또한 되돌려졌다. 당연히 왕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여자 사관제도를 도입하자는 신하들의 제안도 사라져 버렸다.
조선이 여자 사관 제도를 도입하였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렇게 되었다면 낮에 편전에서 왕과 신하가 나라의 일을 의논하는 장면에 더하여 밤에 대비전에서, 혹은 왕비의 궁에서 나눈 기록들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500년 역사에 왕은 27명이었지만 왕비는 45명이었다. 기록을 통해 조선의 국왕과 함께 왕비나 시대별로 중요한 역할을 한 후궁들의 성품과 언행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이 어떻게 왕을 보좌하고 조언했는지도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신독(愼獨)이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간다는 말이다. 조선의 왕과 신하가 함께 꿈꾸던 왕도정치의 완성은 왕의 수신(修身)으로 시작된다는 믿음이었으니 왕의 사생활은 보호되지 않았겠으나 정치는 보다 맑아졌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다시 읽고 새길만한 실록의 기록이다.
"여자 사관이 궁궐 깊숙한 곳의 일을 보는 대로 기록하여, 후세의 왕과 현인들로 하여금 선왕(先王)은 깊은 궁궐 안 혼자 있는 곳에서도 잘못하는 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권징(勸懲,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하는 바가 클 것입니다.” (중종실록, 재위 14년 4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