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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Sep 26. 2022

중국 가는 사신단에 청탁하다 파직당한 재상

베를 팔고 원하는 물건을 사 오게 하였으니, 대신의 체통이 아닙니다


 베를 팔고 원하는 물건을 사 오게 하였으니, 대신의 체통이 아닙니다

 

 조선 전기에는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않았다. 권세가들이 중국 북경으로 가는 사신단에 물건을 사달라고 청탁할 때, 삼베, 여우나 족제비 가죽 등을 맡겨 사 오도록 했다. 이러한 일은 사신단의 짐을 싣고 가는 말에 가중된 부담을 주어 먼 길에 어려움을 주었다. 또한 중국에서 금지된 물건을 사서 외교관계에 문제를 일으킬 위험도 있었다. 조정은 사신단의 상거래 행위를 엄격하게 법으로 막았다. 


 이 문제의 엄중함은 문종과 승지의 대화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문종 1년 9월, 승지 노숙동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이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을 때, 비록 정사(正使)나 부사(副使)의 여행할 때 쓰는 물건인 행장이라 할지라도 검찰관이 일일이 수색하고 점검하였습니다. 세종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명나라에 가는 사신들이 물건을 중국에 가지고 가서 금은과 비단을 몰래 매매해 가지고 오곤 하는데 이제부터는 일체 모두 금한다.’고 하셨습니다. 이후로 그 법이 엄하게 시행되고 있습니다." (문종실록, 재위 1년 9월 24일)


 그런데 성종 때 재상과 권세가들이 사신단의 통역을 담당하는  통사(通事, 역관)에게 중국 물건을 사 오라고 청탁한 사실이 드러났다. 조정은 재상을 포함한 고위 관리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법을 어긴 것을 보고 술렁였다.   


 1477년 성종 8년 4월 17일,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그날 임금은 교하(交河, 지금의 경기도 파주지역)의 현감이 임지로 내려가면서 올리는 하직인사를 받았다. 성종은 신임 현감에게 당부했다.

 "마땅히 백성으로 하여금 원통하고 억울함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만일 원통하고 억울함이 있다면 수령이 직무를 제대로 못한 것이다. 과인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잘 살펴라." (성종실록, 재위 8년 4월 17일)


 교하 현감이 물러나자, 도승지 현석규는 의금부의 보고서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우찬성 서거정, 전라도 관찰사 이서장, 형조 참의 한언, 사헌부 감찰 하형산 등 13인이 북경에 가는 통사 조숭손에게 베(布)를 주어 중국에서 무역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법을 범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였습니다. 모두 체포하여 국문하기를 청합니다."


 임금은 이러한 일에 재상이자 대제학인 서거정이 포함된 것에 대해 실망했다. 서거정은 나라의 학문과 문장을 주도하는 대제학으로서 선비들에게 모범이 되고 존경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닌가. 임금이 탄식했다. 

 "우찬성이 부탁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 조정의 대신이 오히려 법을 지키지 않다니......"


 도승지가 아뢰었다. 

 "베를 통사에게 주어 중국의 저잣거리에서 베를 팔고 원하는 물건을 사 오게 하였으니, 대신의 체통이 아닙니다."

 임금이 명했다.

 "갑자기 대신을 의금부 옥에 가둘 수 없다. 당상관 이상은 가두지 말고 국문하고, 전라관찰사는 즉시 교체하는 것이 옳겠다." (성종실록, 재위 8년 4월 17일)


 성종은 이번 일을 제대로 살피고자, 곧바로 서거정을 불렀다. 서거정이 어전에 나와 절하고 엎드리자, 임금이 물었다.

 "사신들의 길목인 평안도가 근자에 행장(行裝, 여행 짐)의 많음으로 인하여 폐단이 심하기 때문에 지난번 천추사(千秋使)가 갈 때에 무역을 못하게 했는데 경이 통사에게 베를 준 것은 무슨 일인가?"

 임금이 머리를 들고 말하려는 서거정을 보며 말을 이었다.  

 “경은 공신이고 조정의 대신이기 때문에 의금부로 하여금 가두지 말고 국문하게 하였다. 경은 과인에게 바른대로 고하라."


 서거정은 변명하며 아뢰었다. 

 "신이 죄가 있습니다. 조카 서팽형이 베 5 필을 조숭손에게 주었는데, 신은 처음에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신이 가장(家長)으로서 어찌 감히 죄를 사양하겠습니까?"

 임금이 말했다. 

 "경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성종은 의금부에 명하여 서거정은 국문하지 말고 서팽형을 옥에 가두고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사헌부의 대관들과 사간원의 간원들은 재상이며 대제학인 서거정이 임금에게 나아가 조카가 한 일이며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변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세게 반발하며 성토하였다. 서거정이 누구인가? 서거정은 세조의 즉위를 도운 한명회, 권람과 동문수학을 한 최고의 권세가가 아닌가. 그의 외할아버지는 개국공신 권근이고, 자형은 정승 최항으로 훈구대신의 중심인물이었다. 


 더구나 서거정은 종 1품 우찬성으로 사역원(司譯院) 제조를 겸한 재상이다. 역관을 양성하는 사역원 책임자라는 직책을 이용해 중국 사신을 따라가는 통사에게 자신이 건넨 베를 팔아 원하는 물건을 사달라고 사사로이 부탁했다는 것이 아닌가.  


  대간들의 의견을 모아, 사간원의 대사간 이세좌와 사헌부의 장령 경준이 나서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북경에 가는 짐에 개인 물건을 많이 실어 말들이 지쳐 힘이 약해지게 되므로 국가에서 엄하게 법령을 세워 금하였습니다. 지금 서거정 등이 법을 어겼으니 진실로 가두고 국문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특별히 가두지 말라고 명하시고, 또 서거정은 국문하지 말게 하시었으니 매우 부당합니다."

 임금이 말했다. 

 "재상이 법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대신의 도리를 잃었다. 하지만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니 어찌 반드시 옥에 가두고 국문해야 하겠는가?"


 대사간이 다시 나서서 아뢰었다. 

 "서거정이 사역원의 책임자로서 통사에게 부탁하였으니, 더욱 옳지 못한 일입니다."

 임금은 서거정의 말을 믿고 대간들에게 말했다. 

 "이것은 서거정 모르게 서팽형이 한 짓이니, 서팽형에게 물으면 알 것이다." (성종실록, 재위 8년 4월 18일)


 대사헌은 정 4품 사헌부 장령 경준이 임금에게 아뢴 결과를 보고 받고 상소를 올렸다. 

 "지금 들으니, 서거정과 한언 등 당상관들을 가두지 말고 국문하라고 명하셨다 하오니, 성상의 은혜가 비록 중하오나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전에는 이런 일로 의금부 옥에 가두지 말라는 것이 있지 않았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모두 옥에 가두고 국문하는 것을 명하시어 국법을 바르게 집행하게 하소서. 서거정이 비록 서팽형의 한 짓이라고 말하나, 조카인 서팽형이 서거정의 집 옆에 살고 있어 조석(朝夕)으로 출입하니, 그가 청탁하는 것을 반드시 알렸을 것인데, 서거정이 어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숙질간이니, 한 집안의 일은 법에 따라 마땅히 집안의 장(長)을 책하여야 합니다. 하물며 서거정은 조정의 대신이며 사역원의 제조로서 죄를 범한 것이 이와 같으니, 그 죄를 밝게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상소에 답을 써서 내려주었다. 

 "의금부가 서팽형을 국문한 결과를 보고받은 뒤에 처리하겠다." (성종실록, 재위 8년 4월 18일)



(대간들이 임금의 답을 받아 들고 어떻게 행동하며, 임금은 서거정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조선 사신단 그림 사진 출처)

https://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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