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치를 기대하다

좋은 임금은 늘 나오는 것이 아니니, 요순 정치를 이룰 기회는 지금이네

by 두류산

1부 새로운 정치를 기대하다


1장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남효온은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삐걱 대문이 열렸다. 행랑아범은 남효온을 보고 머리를 숙이며 반가워했다. 남효온과 함께 온 선비는 처음 보는데, 훤칠한 키에 윤이 나는 옻빛의 갓을 쓰고 갓끈을 단정히 매었다. 도포 위에 회색의 띠를 어울리게 매어 기품이 풍겨 나왔다.


남효온이 물었다.

“주계부정은 계시는가?”

주계부정은 종친인 이심원에게 나라에서 내려준 봉작명이다.

“예, 반가워하실 겝니다.”


행랑아범은 바람을 일으키듯 빠른 발걸음으로 앞서며 두 사람을 사랑으로 안내했다. 이심원은 남효온을 기쁜 목소리로 맞았다.

“어서 오시게.”

남효온이 함께 온 선비를 소개했다.

“주계가 좋아할 사람이라 특별히 모셔왔네. 이름은 들어보았을 걸세.”


남효온의 옆에서 보일락 말락 미소 짓고 서있던 선비가 인사를 했다.

“함양에서 올라와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정여창입니다.”

이심원은 정여창이라는 이름에 펄쩍 뛸 듯이 반가워했다.

“높이 알려진 성함은 많이 들었습니다. 함양에서 스승님의 제자들 중에 정여창과 김굉필 등의 인걸이 있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이제야 뵙게 되는군요.”


남효온은 정여창과 이심원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주계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서 사서와 오경은 이미 막힘이 없네.”

이심원은 손을 저으며 남효온의 입을 막고, 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남효온은 이심원이 멋쩍어하자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일두(一蠹)는 이불을 펴고 자는 시간도 아까워할 만큼 학문에 열심히라네. 오죽하면 성균관에서 정모(鄭某)는 참선으로 잠을 해결한다는 소문이 있겠나.”

일두(一蠹)는 ‘한 마리의 좀 벌레’라는 뜻으로 정여창의 호이다.

정여창도 손을 저어 남효온의 말을 부정하자, 세 사람은 서로 보고 크게 웃었다. 정여창이 남효온 보다 몇 살 위이나 이미 두 사람은 말을 서로 편하게 하였다. 남효온과 동갑인 이심원도 정여창과 말을 편하게 하기로 하였다. 세 사람은 곧 친한 벗이 되었다.

정여창이 술을 입에 안 댄다는 남효온의 말에, 이심원이 말했다.

“내 집에 좋은 차가 있다네. 술도 좋지만 향기로운 차 맛을 함께 즐기는 것도 좋을 걸세.”

이심원과 남효온은 지방의 목민관으로 내려가 있는 스승이 그리워 정여창에게 세세히 물었다. 함양에서 스승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스승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제자들과 함께 지리산도 올랐다는데 동행하였는지 등을 물었다. 정여창은 하나하나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작은 다과상이 들어오자, 이심원은 차 주전자를 들어 손수 차를 따랐다. 향긋한 차 내음이 금세 방 안을 채웠다. 이심원은 두 사람에게 차를 권했다. 남효온이 찻잔을 입에 살짝 대니 차의 은은한 향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남효온은 쌉싸름한 차 맛을 잠시 즐기고는 이심원에게 물었다.

“종친들과 대신들이 천지 산천의 신령과 달과 별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네. 자네도 참석하는가?”

이심원은 얼굴이 붉어지며 답했다.

“어찌 도를 배운 사람이 음사(淫祀)에 참석하겠는가. 불교를 좋아하시던 세조 때 하게 된 것이니 하루속히 바로잡아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네.”


남효온은 올바르지 못한 일에는 항상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이심원이 좋았다. 정여창이 거들었다.

“귀신과 부처가 어찌 수복(壽福)을 가져다줄 수 있겠나? 음사를 금하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다고 들었네. 위에서 법을 따르지 않으니 폐지해야 할 관습이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네.”

남효온이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주상이 복을 누리고 오래 사시라고 비는 제사이니 신하가 감히 말할 수 없고, 그동안 관행처럼 해왔던 일이니 바꿀 수 없다고들 하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낡은 관습을 바꾸지 못한다면, 아무리 어진 국왕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이심원이 엄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회가 된다면, 온 조정의 신하들이 함께 있는 조회 자리에서 드러내 놓고 음사의 폐지를 주상께 간절히 아뢸 생각이네.”

남효온이 이심원의 말에 걱정하며 말했다.

“자네의 호가 성광(醒狂)이긴 하지만, 그랬다간 대신들은 물론 종친들이 모두 자네 부친과 조부에게 항의하고 욕할 것인데 괜찮겠나?”

성광(醒狂)은 깨달은 미친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여창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성광(醒狂)이라? 멋진 별호이네.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면 분노를 하는 것이 의로운 것이네. 모두가 하던 것이라고 순응하고 살면, 어떻게 세상이 바뀌겠나?”

세 사람은 임금에 대한 기대가 컸다. 정여창이 말했다.

“우리 군주의 아름다운 점은 비록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귀를 열어 다른 의견을 듣는다는 점이네.”

남효온은 정여창의 말을 옳게 여겼다.

"주상은 간언을 쫒는 아름다움이 백왕(百王)에 뛰어나서 대간으로 하여금 말을 숨기지 않게 하시네. 이것은 곧 순(舜) 임금의 치세와 같네. 온 나라 신민이 말하기를, 참 군주가 나왔으니 태평을 기대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네.”


이심원도 두 사람의 말에 동조했다.

“주상과 같은 임금은 때마다 나오는 것이 아니네. 잘못된 구습을 타파하고 요순시대의 정치를 실현할 기회는 지금이라고 생각하네.”

이심원은 잠시 어두운 표정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주상은 옳다고 생각하면 결단하여 시행해 나가야 하는데, 큰일과 작은 일을 모두 재상들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것이 아쉽네. 늙은 대신들은 젊은 임금이 좋은 생각을 가지고 바꾸고자 해도 옛 제도를 지켜야 한다며 가로막기나 하니......”


정여창이 이심원을 위로했다.

“친정체제가 되어도 젊은 군주가 독단적이지 않고 여러 사람의 뜻을 물어서 결정하는 것은 성군(聖君)의 덕목이네. 하지만 좌우에 있는 훈구대신들은 고루한 사람들이라, 바꾸고 개혁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만 여기니 문제일세.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예전부터 하던 제도면 무조건 그대로 두는 게 마땅하다고만 하고......”


남효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왕 때 제도가 시작하였는데, 우리는 그분들보다 현명하지도 못하면서 감히 바꿀 수가 있겠는가 하면 어떻게 개혁을 할 수 있겠나? 후세 사람들도 지금 우리가 바꾸지 않았으니 감히 고칠 수 없다고 할 것이네. 그렇게 되면 도리에 맞지 않고 잘못된 제도라도 이 나라가 망할 때까지 바꿀 수가 있겠는가?”


세 사람은 훈구대신들이 유학자들의 백 년 숙원인 요순 정치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이심원이 말했다.

“훈구대신들 입장에선 세조 때에 만든 제도를 바꾸는 일은 어떤 면에서 자신들의 공을 지우는 것 같아 두려운 것 일수도 있네.”

정여창은 자세를 꼿꼿이 하며 말했다.

“낡은 가죽을 벗겨내지 않고는 말 그대로 새로운 가죽으로 바꾸는 혁신(革新) 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일세. 그러기에 옛사람이 말하기를, 선(善)한 것을 좋게 여기고도 도입하지 못하고, 악(惡)한 것을 미워하면서도 없애지 못한 것이 나라를 망친 까닭이라고 하지 않았겠나.”


세 사람은 나라가 바로 되고 나아지려면 이를 가로막는 훈구대신들이 모두 물러나야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정여창이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풍속이 야박해지는 것은 시세(時勢)가 그러한 것이고, 세상의 도의가 점점 떨어지고 풍속이 옛날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늙은 자가 다시 젊어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네.”


이심원과 남효온은 정여창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임금이 성인의 도를 돈독히 하시면 풍속이 따라서 좋아질 것이고, 임금이 앞장서서 절약하고 검소하시면 풍속이 저절로 근본에 힘쓸 것이네. 임금이 허명(虛名)을 싫어하시면 풍속이 날로 실질을 쫓을 것이고, 임금이 이(利)를 말하지 아니하시면 풍속이 날로 의(義)를 좇을 것이네.”


이심원은 차분하고 진지한 정여창이 좋았다. 어려운 말을 하지 않아도, 학문과 생각의 깊이가 배어났다. 평범한 말을 하는듯하였으나 향기가 있어 헤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정여창이 한 말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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