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원과 남효온은 정여창이 세종대왕의 능을 참배하고 싶어 하기에 날을 잡아 길 안내를 겸하여 함께 여주로 향했다. 들판은 고개 숙인 벼로 황금물결을 이루었고, 가을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얼굴에 부딪히는 햇빛이 싫지 않았다.
정여창이 누렇게 익은 벼들이 출렁이는 모습에 감탄을 터뜨리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봄날의 푸른 하늘을 창천(蒼天)이라고 하지만, 가을의 푸른 하늘을 민천(旻天)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네.”
정여창은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벼가 출렁이며 자라고, 과일이 무르익는 가을이 아닌가. 단순히 푸를 창(蒼)의 하늘이 아니라,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아 주는 어질 민(旻)의 가을 하늘이라는 뜻이 아니겠나.”
이심원은 진지한 정여창을 바라보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이심원이 예전부터 알고 있는 능참봉(陵參奉, 능을 관리하는 종 9품의 벼슬아치)의 안내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英陵)을 제대로 돌아볼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효령대군의 증손자인 이심원에게 작은 증조부였다. 세 사람은 주상이 세종대왕처럼 성군이 되길 기원했다. 정여창이 질문인 듯 질문이 아닌 듯 두 사람에게 물었다.
“세종대왕 때에 뛰어난 정승도 많았고 인재가 넘쳤다고 들었네. 명신(名臣)들이 성군을 만든 것인가, 성군이 명신들을 만든 것인가?”
이심원은 조정의 주요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훈구대신들을 생각하며 말했다.
“신하가 어질지 아니하면 임금이 아무리 하고자 해도 어떻게 뜻을 이루겠는가?”
남효원이 이심원의 말을 거들었다.
“성균관이 유명무실하여 학문을 가르치는 스승이 된 자는 문장의 뜻을 새길 줄도 모르고, 제자가 된 유생들은 과거시험에서 급제나 노려 글의 의미를 깨치기보다는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기나 하여 벼슬만을 구하고 있는 실정이네. 이러니 어떻게 제대로 된 신하가 나오며, 이런 신하들을 거느리고 어떻게 임금이 성군(聖君)이 되시겠는가.”
이심원은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곧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 아니겠나. 임금이 사람을 쓰는 일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일과 같아서, 속이 썩은 나무를 기둥으로 쓰면 집은 곧 무너져 버릴 것이 정한 이치네. 나라가 세종대왕 때처럼 태평성대가 되려면, 주상이 조정에서 녹만 축내는 소인들을 하루빨리 내쳐야 한다고 보네.”
남효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세종 때에는 재상과 대신들 중에 부유한 자는 드물었고 풍속이 검소함을 숭상하였다고 들었네. 지금은 어떤가? 정승판서를 차지한 훈구대신들이 국가에서 주는 녹으로도 넉넉할 것인데, 재물을 늘리기를 서로 다투고 사치하는 퇴폐한 풍속이 눈뜨고 못 볼 지경이 되었네.”
이심원도 거들었다.
“권문세가는 논과 밭이 길을 연하였으나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으니, 백성들은 권세가의 집에 의탁하여 종이 되고 혹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길밖에 없는 것이네.”
세 사람은 무거운 마음으로 영릉을 떠났다.
세 사람이 영릉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구슬픈 소리가 들려왔다.
“북망산천이 멀다더니, 내 집 마당이 북망이구나.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하고 절통하다.”
북망은 한(漢) 나라의 수도인 낙양에 가까이 위치한 북망산(北邙山)을 가리키며, 한 나라의 왕후나 재상들 대부분 이곳에 묻혔다.
관을 실은 상여소리였다. 세 사람은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았다.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집 주위를 돌고 있었다. 한이 서린 듯한 상여소리는 집 주변을 돌아 하늘과 땅 사이로 울려 퍼졌다.
“원통하고 절통하다. 내 집 마당이 북망이 되다니.
억울하고 원통하다. 고리 빚이 웬 말인가.
백 년 집을 이별하고, 만년 집을 찾아가자.”
이심원이 상여 행렬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에게 물었다.
“무엇이 억울하고 원통하다는 게요?”
“이 집 마당에서 살인이 났어요. 빚 받으러 온 자가 목숨까지......”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이 집주인 허 서방이 흉년으로 대갓집에서 곡식을 빌렸는데, 이자가 늘어 지금은 빌린 곡식의 몇 배가 되었으니 어찌 갚을 수가 있겠소. 추수한 모든 곡식을 모조리 다 가져가려고 하니 조금이라도 남겨 놓으라고 당연히 사정을 하였겠지요. 그랬더니 그 자들이 땅을 구르고 고함을 지르며 허 서방을 마당에 패대기치고는 사정없는 매질로 피가 흘러 옷을 적시게 하였소. 그것도 모자라, 곡식이 없으니 필요 없겠다 하며 부엌의 밥 짓는 솥까지 떼어가는 것을 보고, 그걸 막으려다가 그만.....”
“누가 그런 못된 짓을 했단 말이오?”
“대갓집 노복과 칼을 든 무사가 찾아와서 위협하다가..... 저 어린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이오.”
사람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여인과 아이들이 상여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관청에는 신고하였소?”
“관아에서 형방이라는 자가 나왔는데 허 서방이 먼저 낫을 들었으니 어쩔 수 없이 가한 행위라고 하면서.....”
옆의 촌로가 거들었다.
“여주목사가 한 대감의 사람이니 한 통속이지.....”
“한 대감이 누구요?”
동네 촌로가 말했다.
“좌의정 한명회 대감 말이에요. 여주목사의 뒷배가 한명회 대감이라는 소문이 자자해요.”
이심원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세 사람은 한달음에 여주 관아를 찾았다.
여주 목사가 출타 중이어서 형방에게 물어보았다.
“상당군 한명회 대감의 노복과 반인(伴人, 호위 병졸)이 저지른 일이라던데, 어떻게 해서 백성을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것이오?”
“허 서방이라는 자가 낫을 들고 위협하여 노복을 따라간 무사가 허서방의 가슴팍을 세게 찼는데, 꼬꾸라지더니 그 뒤로 숨을 못 쉬었다고....”
동네 사람들의 말대로 여주 관아는 한명회의 기세 때문에 사건을 그대로 덮을 것처럼 보였다. 정여창은 여주 관아를 나오면서 분노했다.
“권세 있는 집의 종들이 고리의 사채를 놓아 빚을 독촉하다가 백성을 저렇게 죽여도 죄를 받지 않는 세상이란 말인가. 왜 조정은 권세가의 사채를 금하지 않는 것인가?”
이심원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사채를 놓아 재물을 늘리는 조정의 대신들은 백성들을 굶주리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구제하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버젓이 이런 짓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네. 그들의 주장은 만약 사채를 금하면 가난한 자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그대로 두는 게 낫다는 것이네.”
“궁한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바로 나라의 책임이지, 어찌 권세 있는 집안들이 사사로이 할 바인가?”
정여창의 말에 남효온도 거들었다.
“그러게 말이네.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는 일이 수령의 가장 큰일이 아닌가?”
정여창은 탄식하며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인가? 이런 식이면 풍년이 들었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나? 대신들의 종들이 매일 같이 찾아와서 주인의 위엄을 빌어 백성을 겁박하여 모든 것을 빼앗아가니, 백성들은 차라리 흉년을 당한 것보다 괴로움이 덜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네.”
이심원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죗값을 받게 해야지.”
“여주 관아에서 보지 않았나. 그들은 죽은 자가 낫을 들어 목숨을 위협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어.”
“관청보다는 사헌부에 탄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글을 모르고 방법을 몰라 당하기만 하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우리가 고발장을 사헌부에 제출하여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도록 하세.”
세 사람은 분노로 가득한 마음으로 도성에 돌아왔다. 이심원은 도성에 돌아오자마자 모든 일을 제쳐두고 곧바로 고발장을 작성하여 사헌부에 접수시켰다. 사헌부는 고발장을 살펴보니, 예사롭지 않은 문장으로 논리 정연하게 사건의 개요를 적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여주 관아로 감찰을 보내 확인하니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은 사실로 밝혀졌다.
사헌부는 감찰의 조사를 바탕으로 임금에게 아뢰었다.
"여주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죄인은 한명회의 노복과 호위 군졸인데 한명회의 사채를 거두다가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한명회의 권세를 믿고서 그러한 일을 서슴없이 벌인 것입니다. 한명회는 가장(家長)으로서 능히 식솔을 감찰하지 못했으니 허물이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권세가의 노복이 가난한 백성을 해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청컨대 죄인과 함께 아울러 한명회를 국문하게 하소서.”
한명회의 사위 윤반(尹磻)이 사헌부가 한명회를 탄핵했다는 소식에 놀라 장인을 찾아, 잘못을 빌었다. 윤반은 한명회의 둘째 사위로, 정희대비의 집안 조카였다.
“저의 노복과 반인(伴人)이 장인어른을 들먹이는 것이 여주 관아나 백성들에게 더 위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만 오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낫을 먼저 들었다고 하니, 별문제 없이 넘어갈 것입니다.”
한명회는 고개를 저었다.
“평상시 같으면 그렇겠으나, 지난번 도치 사건 때 주상이 나에게 노복 단속을 잘하라고 했는데 또 이런 일이 생겼으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한명회는 임금에게 나와서 사실대로 변명하였다.
"사람을 죽인 한윤옥은 사위 윤반의 반인인데, 사채를 회수하러 가서 저의 이름을 팔았다고 하옵니다.”
“죄인이 사위의 반인이라면 경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하지만 윤반은 식솔을 잘못 간수한 죄를 피해나갈 수 없을 것이오.”
성종은 사헌부에 명했다.
“죄인은 상당군의 사위 윤반의 반인임이 밝혀졌다. 윤반이 식솔을 잘못 간수한 죄가 없는지 살펴라.”
사헌부가 사건을 조사한 후 임금에게 보고했다.
"윤반의 반인과 종들이 빚을 받는 일로 인하여 사람을 죽였는데, 윤반은 가장(家長)으로서 그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법에 따르면 죄가 장(杖) 80대에 고신(告身)을 추탈해야 합니다.”
고신(告身)은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이었다.
임금이 사헌부에 명했다.
“윤반이 어찌 사람을 죽이라고 가르쳤겠는가. 하지만 식솔을 잘못 관리하여 사람을 죽게 한 죄가 크니, 벼슬을 파면하도록 하라. 또한 가장을 잃은 백성의 집을 잘 보살피며 반성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