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치를 기대하다 (3)

선왕 때 제도라도 만일 도(道)가 아니면 어찌 내버려 두겠습니까

by 두류산

3장


임금이 사헌부에 지시하여 사건을 종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정여창은 이심원을 치하했다.

“주계가 아니었다면 권세가에 억울하게 당한 백성의 한이 하늘에 사무쳤을 것이네.”

“어찌 나만의 공인가. 우리 세 사람이 마음을 모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네.”

남효온이 정여창을 거들었다.

“하지만 주계가 종친으로 여주 목사와 같은 3품의 품계가 아니었다면 어찌 여주 관아에 쳐들어가 호령을 할 수 있었겠는가.”


세 사람은 함께 웃었다. 세 사람은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권세가들이 높은 이자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것을 금지하는 등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자신들을 가르치는 성균관 교수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내가 성균관에 들어와서 학문을 배우고자 했을 때는 조선 최고의 스승이 이곳에 다 계신 줄 알았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네. 저 스승에게서 도(道)를 배우려 하나 도를 찾아볼 수가 없고, 저 스승에게서 학업을 배우려 하나 학문의 깊이가 없으니.......”

“썩고 용렬한 무리들이 사유록(師儒錄)에 이름을 올리고, 교관 벼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야.”


사유록은 학문이 뛰어나고 행실이 모범이 되어, 유생을 가르치는데 적합한 사람을 미리 선정하여 만든 명단이었다. 사유록은 의정부와 이조, 홍문관의 당상들이 모여 주로 문과를 급제한 자 중 경전에 정통하면서 어질고 덕이 있는 자를 대상으로 작성하였다.


좌부승지 손비장이 성균관 유생들의 불만을 듣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지금 성균관에서는 유생들을 가르칠 제대로 된 스승이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딱한 일이로다. 누가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가?”

“김종직은 학문이 매우 정통하고 능숙하며, 사람됨도 뛰어나 출중한 재주에도 행실이 넉넉하여 성균관의 장(長)인 대사성을 맡을 만한 자입니다. 다만 어머니가 연로하여 지금 선산부사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자로는, 예문관의 사관인 표연말도 학문에 뜻을 두어 자못 학문이 정통하고 능숙합니다.”


임금은 멀리 있는 김종직이 아쉬웠다.

“김종직은 어머니 봉양을 위해 목민관으로 내려가 있고, 표연말은 신진이라 곧바로 대사성으로 올리기에는 어렵지 않은가.”


성균관의 유생들 사이에 새로운 풍조가 생겼다. 그들은 성균관 교수에게 의존하지 않고 소규모로 모여 함께 책을 읽고 그 뜻을 논의하며 스스로 공부하였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김종직의 제자들 중에서 남효온, 신종호, 강백진 김용석, 손효조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성균관에서 경전만 읽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학(下學)으로부터 상달(上達)로, 쉬운 것부터 배워 깊고 어려운 것을 깨달아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소학(小學)》으로 성현이 가르친 도를 몸으로 익힌 연후에야 경전을 읽으며 인의(仁義)를 강구해야 할 것이네.”

“실천으로 수양하는 모습이 바로 성인을 닮아가는 도학적 풍모인 것이네. 스승님께서도 일상적인 이치를 공부하고 실천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성인의 가르침 그 자체를 확연하게 인식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고 하지 않으셨는가.”


《소학》은 아동의 교육서로, 일상생활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성현의 말씀과 행동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실천을 염두에 둔 수양서이다. 주자(朱子)는 여덟 살이 되면《소학》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며, 《소학》은 집을 지을 때 터를 닦아 준비하는 것이며 《대학(大學)》은 그 터에 재목으로 집을 짓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김종직의 제자들과 강응정, 박연 등 장안의 준걸한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소학》을 서로 강론하며 뜻을 키웠다. 성인을 배우고 본받기 위해 실천하며 수신(修身)을 중심으로 경전을 공부하고 실천하자는 학문 쇄신운동이었다. 이들은 일종의 상조회를 겸한 친목모임을 결성하였다. 모임은 돌아가면서 주관하여 준비하도록 하고, 부모와 본인, 처와 처부모가 사망하는 경우 베나 종이를 부의로 보내기로 하였다.


이들은 유생을 상징하는 푸른 깃의 옷인 청금(靑衿)을 입고 두건을 쓰고 큰 소리로 말하거나 떠들지 않고 서로를 예의로서 대하여,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소학의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일컬어, 《소학》을 중시하며 뭉쳤으니 '소학계(小學契)'라고도 하고 지극히 부모에게 효도를 강조하고 실천하니 '효자계(孝子契)'라고도 하였다.


이심원과 정여창은 비록 소학계의 계원은 아니었지만, 소학의 도를 실행한다는 기치를 걸고 서로 모여 공부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기풍을 좋게 보았다. 이들이 대부분 김종직 문하의 제자들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계모임에 수시로 초대받아 함께 공부하며 학문을 논하였다.


이들 젊은 선비들은 성현의 가르침을 깨우쳐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수양하고, 더 나아가 요순시대처럼 왕도가 지배하는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들이 보기에 세조의 찬탈을 도운 훈구대신은 왕도정치에 어울리지 않는 구세력이었다. 이들의 눈에 비치는 훈구대신들은 조정의 권력을 모두 잡고 나라의 장래보다는 기득권을 지키는데 급급한 세력으로 보였다.


다른 유생들에게 이들의 행동은 자못 남다르고 특이하였다. 그들의 모임은 엄격하게 관리되어 뜻에 맞는 사람들만 함께 모여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으므로 그 모임에 들어가지 못한 유생들은 그들이 성인(聖人) 행세를 하며 논다고 조롱하고 시샘하였다.


조정의 대신들은 젊은 유생들의 이러한 풍조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달가워하지 않았다. 특별히 이들 젊은 선비들이 어려운 시절을 버티며 사직을 지켜온 자신들의 존재를 비판한다는 말에 격분했다.

“선배를 존중하는 선비들의 풍습은 어디로 간 것인가.”

훈구대신들은 자신들을 부정하는 것이 세조 이후의 조정과 자신들의 지위에 대한 정통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신구 대립으로 이어져 작고 큰 마찰을 일으켰다.


1477년 성종 8년 9월 9일, 조회가 열렸다. 이심원은 조회 중에 열에서 나와 그동안 가졌던 생각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법전에 산천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는 행위인 음사(淫祀)를 금하는 것이 실려 있습니다. 하지만 법을 따르지 않으므로 나쁜 풍습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성수청(星宿廳)의 수리를 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허탄한 것들을 믿지 않음을 알고 있으나, 바깥사람은 어찌 다 알겠습니까?”


성수청은 국가와 궁중에서 의뢰하는 굿을 담당하던 국무당(國巫堂)으로 하여금 국가와 왕실의 복을 빌거나 기우제 등의 행사를 전담하게 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관서였다. 음사(淫祀)는 유교의 가르침과 명분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궁중에서 대비전의 믿음으로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음을 젊은 선비들은 한심하게 여겼다.


성종은 이심원의 담대하고 호걸스러운 모습이 보기 좋았다.

"경의 말은 대단히 옳다. 하지만 과인이 처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대(先代)에 시작한 것이다.”

"축수재(祝壽齋)는 군주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하가 감히 없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옛말에 복을 구하기를 간사한 데 하지 말라 하였고, 모르는 귀신한테 제사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국왕이 능히 어진 정사를 행하면 근본이 굳어지고 나라가 편안하여 한없이 장수하실 것인데, 어찌 사도(邪道)에서 복을 구하겠습니까?”


축수재는 국왕과 왕후 등의 장수(長壽)를 빌기 위하여 부처에게 올리던 공양이었다. 축수재는 불교 행사의 하나로 고려 때부터 행했는데, 조선 태종 때에 매년 행하던 축수재를 혁파했다. 하지만 세조 때에 이르러 여러 절에서 왕의 생일에 축수재를 하였고, 그 행사가 성종 때에도 지속되었다.


이심원이 우렁찬 목소리로 축수재 폐지를 주장하자 조회에 모인 조정의 신하들은 서로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임금은 가까이에 입시한 정승들을 돌아보고 이심원의 의견에 대해 물었다. 우의정 윤자운이 나서서 아뢰었다.

"수명을 비는 것은 전하를 위하는 일이니 비록 정도(正道)가 아니더라도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심원은 즉각 나서서 목소리를 높여 반박하였다.

"윤자운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신하가 국왕의 수명을 빌면서, 겉으로는 따르고 마음으로는 옳지 않다고 여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선대(先代)부터 행하던 일이라 하더라도 만일 도(道)가 아니면 어찌 내버려 두겠습니까? 청컨대 즉시 폐지하소서.”


이심원이 정승의 이름을 거론하며 대놓고 비판하자 조회에 모인 조정의 신하들은 웅성거렸고, 윤자운은 얼굴이 붉어졌다. 임금은 세 대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 명의 대비는 세조의 비인 할머니 정희대비, 예종의 비로 양모(養母)인 인혜대비, 그리고 생모(生母)인 인수대비였다. 세 대비는 모두 독실하게 불교를 믿어, 부처에게 임금의 장수를 비는 축수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성종은 이심원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대비전과 이 문제를 의논해 보겠다.”

임금이 이심원의 말을 좋게 생각하여, 축수재 폐지를 고려해보겠다는 말에 조회에 모인 신하들은 다시 술렁거렸다.





(사진 출처)

https://kr.freepik.com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새로운 정치를 기대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