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를 마치고 성종이 먼저 자리를 뜨자, 임금 가까이에 서있던 대신들은 혀를 찼다. 영의정 정창손이 윤자운을 위로했다.
“말세로세, 말세야! 주상전하를 위한 일을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다니, 이것이 어찌 신하가 대놓고 할 말인가 말이오!”
좌찬성 윤필상도 영의정을 거들었다.
“이심원은 종친인데 어찌 생각이 그토록 얕은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대신들도 한 마디씩 했다.
“철없는 종친이 언감생심 군주의 복을 비는 일을 그만두자고 청하다니요”
“요즘 젊은 사람들의 생각이 짧아서 그래요. 옛날 것은 고루하니, 모두 고치고 없애야 한다는 못된 생각을 하고 있어요.”
윤자운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창손과 윤필상 등 훈구대신들은 이날 이후 이심원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고비마다 이심원과 각을 세웠다.
뒷줄에 선 신진 관료들은 대신들이 먼저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며, 서로 돌아보며 이심원을 칭찬하였다. 사간원의 헌납 안침도 조회에서 축수재를 옹호하는 정승 윤자운을 당당히 나무라는 이심원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주계는 인걸이네, 그려. 국왕의 수명과 복을 구하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신하가 되어서 진실로 감히 간(諫)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그걸 해내다니!”
안침은 이날 이후 강개한 이심원을 좋게 보았다. 훗날 이심원이 애매하게 불효의 죄를 얻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심원을 구제하기에 힘썼다. 안침은 성균관 대사성, 대사헌, 공조판서를 역임하며 성종의 치세를 도왔다.
홍문관 부응교 채수는 조카 이심원이 자랑스러웠다.
“축수재가 그릇되었으니 고쳐야 한다고 충심으로 말씀드렸고, 성상께서 이심원의 말을 좋게 여기셨어요. 정승이란 사람의 행동을 보세요. 군주가 의견을 구하면 바른말이니 받아들이소서 하고 아뢰어야 도리이거늘, 정도(正道)가 아니더라도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다? 이래서야 어디......”
예문관의 표연말도 거들었다.
“오늘 윤 정승의 말은 경전을 읽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닙니다.”
이심원이 조회에서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재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일은 장안의 선비들에게 빠르게 퍼졌다. 성균관 유생들도 모여서 이 소식을 나누었다.
"군주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축수재를 신하가 감히 중지하라고 했으니, 정말 기개 있는 선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주었네.”
“귀신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하는 축수재를 어찌 어진 임금이 따를 수 있느냐고 모든 중신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간하였다는 말을 들으니, 십 년 먹은 체증이 내려가네, 그려.”
"그런데 정승이라는 사람은 비록 사도(邪道)라고 하더라도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다고 했다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임원준이 사돈인 보성군의 집을 찾았다. 40여 칸이 넘는 거대한 저택이 눈에 들어오자 임원준은 어젯밤 임사홍이 찾아와서 한 대화가 떠올랐다.
“왕실에서는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손자인 열산수(列山守)를 두고, 적자가 아니니 대를 이을 수 없다는 논쟁이 있습니다. 지금 원천군이 적자가 없으니, 태종의 손자이신 장인어른께서 성녕대군의 뒤를 이을 수 있습니다. 원천군이 성녕대군에게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가 매우 많으므로, 만약 장인어른이 이를 상속하면 훗날 우리도 상속을 받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입니다. 아버님께서 장인어른과 친하시니 은근히 조언을 해주시며 좋겠습니다.”
임원준이 솟을대문 앞에 이르자,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이리 오너라!”
대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청지기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이구 대감님, 어인 행보이시옵니까요?”
“어인 행보라니? 내가 못 올 곳에라도 왔더냐?”
“그게 아니굽쇼, 하도 오랜만이시라......”
임원준의 예기치 않은 방문에 보성군은 댓돌까지 내려서며 반갑게 맞았다
“어인 행보십니까, 미리 연락도 없이요.”
보성군은 임원준의 손을 잡아끌며 방으로 인도했다. 반갑게 맞는 보성군과 함께 사랑에 오르며 임원준이 말했다.
“이심원이 조회에서 우의정 윤자운을 나무라는 모습이 과연 보성군의 손자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성군은 얼굴이 붉어지며 말했다.
“축수재는 재상과 종친들이 힘을 모아 주상의 장수를 기원하는 행사인데, 신하이며 종친으로서 폐지를 논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잠시 후 주안상이 나왔다. 보성군이 먼저 임원준의 잔을 채웠다. 임원준은 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원천군이 돌아가자 왕실에서는 첩의 아들인 열산수(列山守)를 두고, 적자가 아니니 대를 이을 수 없다는 논쟁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임원준이 고개를 끄덕이는 보성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지금 원천군이 적자가 없으니, 태종의 손자이신 보성군께서 성녕대군의 뒤를 이을 수 있습니다.”
보성군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미 왕실에서 열산수가 뒤를 잇기로 거의 결정을 하였습니다.”
임원준은 속으로 아쉬워하며 말했다.
“거의 결정을 했다는 것이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는 않은 것이 아닙니까.”
“하긴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오천부정(烏川副正)이 양녕대군의 장손(長孫)이지만 서출이라 하여 제사를 받들지 못하고 대군의 둘째 아드님이며 적자인 함양군이 상속하였습니다.”
종친의 칭호와 품계는 대군(大君), 군(君, 정 1품에서 종 2품), 도정(都正, 정 3품), 부정(副正, 종 3품), 수(守, 정 4품)로 나누어져 있었다. 대군과 왕비, 공주는 따로 품계가 없었다.
임원준은 보성군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오천부정이 자신의 예(例)를 들어 상소를 올리면 열산수로 하여금 성녕대군의 뒤를 잇지 못하게 될 것 아닙니까? 성녕대군의 후사가 적자에게로 옮겨진다면 사돈께서 반드시 뒤를 잇게 될 것입니다. 오천부정은 인척이니 불러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보성군은 구미가 당겼다.
“사실 저보단 주계가 오천부정하고 친합니다. 심원이 오천부정에게 이야기하면 말한 대로 할 것입니다.”
보성군은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만, 내가 손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임원준은 보성군의 뜻을 알아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겠지요. 내가 주계부정에게 넌지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임원준은 임사홍의 아내 이씨를 통해, 이심원을 집으로 불렀다. 이심원이 고모의 전갈을 받고 임원준의 집을 찾으니 임원준이 반갑게 이심원을 맞았다. 임원준은 이심원에게 오천부정에게 상소를 올리게 하여 성녕대군의 후사를 조부인 보성군이 뒤를 잇게 하라고 설득하였다. 이심원은 임원준의 꾀가 매우 간사하다고 생각하였다.
“증조부인 효령대군의 뜻이 이와 같지 않아 열산수가 뒤를 잇게 하였는데, 조부인 보성군께서 어찌 부친의 뜻을 거역하고 성녕대군의 뒤를 잇겠습니까?”
임원준이 이심원에게 슬며시 말했다.
“팔십여 세가 된 대군인데, 보성군이 부친의 뜻을 거스를지라도 얼마나 더 오래 사시겠는가?”
이심원은 임원준이 재물만 밝히는 비열한 소인으로 보였다. 이심원은 더 이상 임원준과 말을 섞기가 싫어 용무가 있다고 인사하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임원준은 이심원이 자신이 한 말을 싫은 기색으로 한 번에 거절하며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민망하여 얼굴이 화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