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맹성이 소인이라고 말한 임사홍은 바로 조부가 아끼는 사위가 아닌가
승지 신준이 이심원의 상소를 들고 입시하여 아뢰었다.
“주계부정이 다시 상소를 올렸습니다.”
“심원은 무슨 할 말이 남았기에......”
성종은 상소를 펼쳐 읽었다.
“전하께서 신의 말이 모두 이치에 맞지 않아서 쓰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중에 비록 한두 마디 취할 것이 있어도 실속이 없어 겉만 화려한 글로 여기셔서 다 버리시는 것입니까?”
성종은 상소를 읽고 승지 신준에게 물었다.
“심원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록 지나친 표현은 있으나, 전하를 성군(聖君)으로 만들고자 하는 충심(忠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성종은 붓을 들어 상소에 답을 내렸다.
"과인이 경의 말을 채용하지 않은 것은 간언을 거절하고자 한 것도 아니고, 공허한 글이라고 해서도 아니다. 만약 선왕의 법도를 허물어뜨리면, 여러 신하가 다투어 얕은 견문을 가지고 명성을 구하려고 분분하게 국법을 고치려고 함이 한이 없게 될 것이므로, 이와 같이 하였을 뿐이다. 지금 경이 세조의 유훈을 인용하고, 조보의 찢어버린 서류를 붙여 다시 아뢴 정성에 비교하여 힘써 도(道)를 말하고 부족한 과인을 요(堯)와 순(舜)과 같은 성군으로 만들려고 하니, 경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말한 바를 쫓아 곧 축수재를 혁파하겠다.”
성종은 세 대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생일을 맞아 전국 사찰에서 행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축수재를 전면 폐지하도록 명하였다.
사관은 이심원이 성종으로 하여금 기어이 축수재를 폐지하게 한 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관은 이날 일을 기록하며 이심원이 도(道)를 숭상하며 지조와 절개를 귀하게 여긴다고 평하였다. 하지만 이심원의 강개함이 과하여 상식적인 것은 아니라고 덧붙여, 당시 이심원을 보는 일반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심원은 독서를 좋아하고, 옛 성현의 도(道)를 흠모하는 자이다. 유자(儒者)를 만나면 반드시 성리(性理)의 연원을 토론하고 지조와 절개를 숭상하였다. 하지만 이심원은 이단(異端)의 책을 보면 찢어서 버리며 언행을 위태롭게 하여, 사람들이 간혹 미친 사람으로 보기도 하였다.'
이심원의 끈질긴 청으로 임금이 축수재를 폐지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도성에 퍼졌다.
“주계부정이 결국 해내었군! 축수재를 폐지한 것은 세조 이후 불교를 좋아하는 나쁜 풍속을 바로잡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야.”
“주상께서도 주계부정이 거듭하여 올린 충성 어린 간언에 감동하여 이런 결정을 내리시게 되었대.”
유생들과 신진 관료들은 환호했으나, 훈구대신들과 나이 든 종친들은 이심원을 비난하였다.
“젊은 유생이 세상 물정 모르고,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수재를 폐지시키게 하다니, 어찌 신하 된 자로서 할 일인가?”
“축수재는 대비전에서 자식과 손자의 복을 빌며 정성을 쏟는 행사인데, 성상(聖上)을 불효하게 한 것이야.”
음사와 축수재 혁파, 성수청 폐지 등은 김종직이 제자들에게 자주 강조한 바이고 제자들도 반드시 필요한 개혁과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훈구대신들은 이러한 의견이 도리에 맞기는 하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 쉽게 폐지할 수 없는 문제라고 여겼다. 훈구대신들은 이러한 주장을 옛 제도와 법을 가볍게 여기는 젊은 유생들의 과격한 생각으로 인식하였다.
표연말은 김맹성의 집을 찾았다. 김맹성이 사간원에서 홍문관 수찬으로 자리를 옮겨 축하차 집에 들렀다. 김맹성은 표연말을 반갑게 맞으며 방으로 안내했다. 표연말이 진심으로 축하했다.
“이제 옥당(玉堂)의 꽃이라는 수찬이 되셨으니 경사입니다. 주상이 내리는 글을 짓는 지제교(知製敎)도 겸하시게 되고, 경연관으로서도 할 일이 많겠습니다.”
옥당은 홍문관의 별칭이었다. 홍문관 수찬은 경연을 담당하여 왕의 자문에 응하고,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를 작성하고, 경서(經書)와 역사책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또한 국가의 모든 편찬사업에 참여하고, 춘추관의 사관 업무도 겸직하였다.
주안상이 들어오자, 김맹성은 표연말의 잔을 채웠다. 표연말이 잔을 받으면서 사간원의 간관이었던 김맹성에게 물었다
“현석규 일은 어찌 된 일입니까? 대간들은 현석규를 소인이라고 탄핵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참으로 소인입니까?”
김맹성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건 아니네. 그를 군자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악한 사람은 아니니 소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네.”
표연말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김맹성은 말을 이었다.
“사간원에서 현석규를 탄핵할 때 소인이라고 지목하지는 않았네. 단지 동료 승지에게 말이 공손하지 못하였다고 공격하였을 뿐이었어. 소인 이야기는 그 뒤에 김언신이 대간이 되자, 현석규를 왕안석과 노기에 비교되는 소인이라고 하였지.”
김맹성은 표연말의 술잔을 채워주고 말을 더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석규가 소인이 아니라 임사홍이 참으로 소인이었네.”
표연말이 받은 술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김맹성은 당시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하루는 대궐에서 사간 박효원이 당시 현석규와 싸우고 있던 당사자인 승지 임사홍을 몰래 만나 말하는 것을 보았네. 마음으로 못마땅하다고 여기고 상관인 박효원을 경고까지 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임사홍이 박효원을 몰래 부추겨서 대간들이 현석규를 공격하게 한 것이었네.”
“그래서, 당시 대간들은 임사홍과 박효원의 꾐에 빠져 현석규를 거세게 탄핵한 것입니까?”
김맹성은 술잔을 비우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된 셈이지. 나와 사간원 간관들은 박효원의 말만 믿고, 처음에는 현석규를 공격하였네. 뒤에 박효원에게 편지로 부추기는 임사홍의 간사함을 깨닫고 임사홍을 공격하고자 하였어. 하지만 동료들이 임사홍의 술책에 빠져 현석규를 공격했으니 명분이 없다고, 그만두자고 하여 이루지 못했네.”
표연말은 김맹성의 술잔을 채우며 물었다.
“그래도 임사홍이 뒤에서 꾸민 일인 것을 알았다면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김맹성은 술잔을 받아 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사간원의 동료와 더불어 임사홍을 제대로 공격해 다스리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
김맹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탄식을 하며 말했다.
“전에는 현석규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였으나, 그 뒤로 들은 바에 의하면 특별히 악한 일을 했다는 것을 듣지 못했네. 김언신이 비록 현석규를 소인이라고 말했으나, 내 생각에 현석규 보다는 임사홍이 참으로 소인이야.”
김맹성은 술잔에 담긴 술을 단 번에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얼마 뒤에 조회에서 내가 나서서 사간원의 일을 보고할 때 임사홍의 간사하고 곧지 못한 일도 잠깐 말하였지만 다른 급한 문제가 논의되는 바람에 계속 말씀드리기는 어려웠네. 그것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있다네.”
표연말이 김맹성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소인들이 시종(侍從)이 되어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니, 어떻게 태평성대를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이 태평하려면 조정에서 임사홍과 같은 소인들을 반드시 쫓아내어야 합니다.”
시종(侍從)하는 신하는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국사를 처리하던 승정원의 승지와 주서(注書), 예문관의 사관, 홍문관의 관원, 사헌부나 사간원의 대간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시종신(侍從臣)이라고 하였다.
김맹성이 술을 더 가져오라고 안채에 말할 즈음에, 이심원도 축하차 김맹성의 집을 찾았다. 김맹성은 손을 벌려 반기며, 이심원을 치하했다.
“선대부터 내려온 구습(舊習)인 축수재를 폐지시킨 것은 대단했네.”
이심원은 먼저 온 표연말을 보고 말했다.
“축수재 해결은 형님 덕분입니다.”
이심원은 표연말이 세조가 아들인 예종에게 한 말을 해준 것이 자신을 깨우쳤다고 말했다. 김맹성은 표연말과 이심원을 대견하게 보며 말했다.
“옳은 말이야. 세상은 변하는데 선대부터 있어왔던 제도라고 고치지 않는다면 둥근 구멍에 네모난 손잡이를 꽂으려는 것처럼 되는 것이야.”
세 사람은 새로이 차려온 술상을 받아 들고 오래도록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표연말과 이심원은 밤이 늦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왔다. 표연말은 이심원이 오기 전에 김맹성이 임사홍과 현석규의 일을 이야기한 것을 전해주었다. 이심원은 고모부 임사홍을 변명하였다.
“고모부가 과거급제를 한 후 처음 벼슬길에 올랐을 때는 바른말 잘하고 기개가 있어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빠르게 벼슬이 올라가고 주상의 가까운 신하가 될수록 지킬 것이 많아졌는지 위에서 좋아할 말만 하고 위에서 불편해할 만한 것은 아무런 진언도 하지 않는 듯하여 저도 실망했습니다.”
표연말은 이심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 세상인심이네.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에 급제하면 열에 아홉은 비록 신상에 손해를 보더라도 나라와 백성을 앞세우겠다고 다짐하지만, 조금씩 벼슬이 오르면 현실에 안주하게 되네. 대개 위로 갈수록 벼슬 문은 점점 좁아지니 위에서 싫어할 만한 말은 입 밖에 내기를 꺼리게 되지. 그러니 당연히 백성과 나라를 위해 고쳐야 할 풍습과 제도를 바꾸자고 말할 수가 없네. 점점 현재에 안주하여 스스로도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놓치고 마는 것이네.”
이심원이 말했다.
“그렇게 되면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실로 둥근 구멍에 네모난 손잡이를 꽂으려는 것처럼 되겠습니다.”
표연말은 얼굴에 엄숙한 빛을 하고 말했다.
“나라가 구습을 타파하고 태평성대가 되려면 권력을 틀어지고 과거 것은 하나도 못 고치게 하는 훈구대신도 문제지만,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 나라보다 자신의 지위가 높아지고 귀하게 되는 것을 앞세우는 속물인 소인으로 채워지는 것이 더 문제이네. 소인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가 되어 주상을 둘러싼다면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이심원은 표연말의 나라 근심에 마음이 격동하였다. 하지만 표연말이 전해준 김맹성의 말은 편하지가 않았다. 김맹성이 소인이라고 말한 임사홍은 바로 조부가 예뻐하는 딸인 고모의 지아비요, 조부가 자랑스러워하는 사위가 아닌가.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