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릉(昭陵)을 복위하라고 하니, 마땅히 옥에 가두고 국문을 해야 합니다
성종실록은 이심원과 남효온의 상소를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었다. 흙비가 내린 하늘의 뜻에 대해 묻는 임금의 구언에 답하여 수많은 상소가 올라왔을 것으로 짐작되나, 실록은 특별히 두 상소의 전문을 싣고 이들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임금과 조정 신하들이 논의하는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것은 당시 두 사람의 상소가 얼마나 조정 내외에 충격을 주었는지 보여준다.
도승지 임사홍은 승지들의 의견을 모아, 임금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상소에서 소릉(昭陵)을 복위하라고 말하는 것은 신하로서 의논할 수 없는 바입니다. 또한 몸이 홍문관에 있고 벼슬이 당상에 이르러 녹이 후하지 아니한 것이 아닌데, 오히려 한 명의 누이를 포용하여 양식을 주어서 생활하도록 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가리킨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를 불러 국문을 해야 마땅하옵니다.”
“신하로서 소릉을 거론함은 부당하다. 그가 한 명의 누이를 용납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 말하였으나, 누구를 지칭함인지 알아내고자 말한 선비를 불러 국문할 수는 없다.”
성종은 남효온의 상소가 과격하였으나, 구언에 답한 것이므로 문제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임사홍은 다시 나서서 아뢰었다.
“이 상소는 심원의 상소와 서로 통합니다. 심원이 경연(慶延)과 강응정을 천거하였는데 남효온도 경연을 추천하였습니다. 신이 듣건대, 남효온의 무리에 강응정, 정여창, 박연 등과 같은 이가 있는데, 따로 무리를 만들어서 강응정을 공자라고 하고 박연을 가리켜서 안연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항상 소학(小學)의 도(道)를 행한다고 하며 이론(異論)을 숭상하니, 이는 진실로 폐풍입니다.”
임사홍은 임금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한(漢) 나라에는 당고(黨錮)가 있었고, 송(宋) 나라에서는 낙당(洛黨)과 촉당(蜀黨)이 있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아직은 세가 미약하나 족히 치세(治世)에 누(累)가 되므로 점점 커지게 할 수 없습니다. 또 벼슬이 없는 일반 선비로서 국가의 정사를 의논하니 더욱 옳지 못합니다.”
성종은 임사홍의 강경한 말에 제동을 걸었다.
“구언(求言)의 명이 있었으니, 말이 비록 올바르지 못하였을지라도 어찌 허물을 따질 수 있겠는가?”
임사홍은 이심원과 남효온을 유학의 이단으로 평가하며, 붕당을 도모한다고 말하였다. 유학의 이단이 되는 것과 붕당의 죄는 참형이나 최소한 유배형에 처할 만큼 심각한 범죄였다. 임사홍이 이심원과 남효온을 엮어 붕당 죄로 몰아간 것은 개인적으로 처조카인 이심원에 대한 임사홍의 불편한 심정을 여실히 나타내었다. 또한 당시 소학(小學)의 도를 실행한다는 기치를 걸고 구세대와 세상을 비판하는 젊은 선비들의 과격한 주장을 비판하는 훈구대신의 시각과 같음을 보여주었다.
임사홍이 붕당 죄를 걸어 이심원과 남효온을 탄핵하자, 옆에서 왕과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던 사관(史官)은 붓끝이 떨릴 정도로 놀랐다. 이 대화 내용은 젊은 사관의 입을 통해 소속관서인 예문관에 전해졌고, 예문관 봉교 표연말을 통해 이심원에게도 알려졌다. 이심원은 고모부인 임사홍이 자신과 절친한 친구인 남효온을 붕당으로 엮어서 임금에게 탄핵했다는 말을 듣고 눈에 핏발이 섰다.
임사홍은 소릉 복원까지 언급한 남효온의 상소를 이심원을 잡을 기회로 여겼다. 도승지 임사홍은 승지들을 다그쳤다.
“이번 상소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일이오. 경연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상에게 남효온과 이심원의 망령됨을 아뢰어 죄를 묻게 해야 하오.”
임사홍은 남효온의 상소 내용을 대신들에게도 알렸다. 승정원 주서에게 지시하여 상소를 필사(筆寫)하여 재상들에게 보여주었다. 남효온의 상소는 순식간에 조정에 알려져 이심원의 상소에 이어 또 한 번 큰 충격을 주었다.
성종 9년 4월 16일, 남효온이 상소를 올린 다음날 임금은 경연에 나아가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어제 유생 남효온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몸이 옥당(玉堂)에 있고 지위가 당상에 올라 녹이 많은데, 한 명의 누이를 포용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이는 인륜에 어긋나는 일인데, 경들은 이 일을 아는가?”
영사 심회가 아뢰었다.
"한 명의 누이를 포용하지 못한다는 말은 반드시 가리킨 인물이 있을 것입니다. 국문하여 알아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구언(求言)을 하고서, 이에 답한 상소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죄인처럼 국문을 하는 것은 불가하오.”
사헌부 장령이 아는 대로 아뢰었다.
"예전에 성상께서 유진(兪鎭)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고자 하니, 이조에서 아뢰기를, 유진은 한 명의 누이를 보호하지 못하여 시장에 다니면서 구걸하게 한다고 하여, 이로써 유진을 심문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동부승지 이경동은 전날 도승지 임사홍이 말한 내용을 공개적으로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남효온은 지난번 심원이 상소하여 천거한 서생 강응정의 무리입니다. 그들 무리가 일찍이 성균관에 있을 때에 서로 높이 받들어 강응정을 공자라고 일컫고 박연을 안연이라고 일컫기까지 하며, 그 나머지를 차례로 성현의 이름을 붙여 부르며 괴이한 행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예전 전국시대에 처사(處士)들이 횡의(橫議)하였는데, 밝은 정치를 펼치는 이때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처사들이 횡의 한다는 말은 맹자가 말한 표현이다. 맹자는 전국시대에 세상이 쇠하여 성왕(聖王)이 나지 않고, 제후들은 방자하며, 처사(處士)들은 각자 멋대로 의견을 내세운다(橫議)하였다. 처사는 학문이 뛰어남에도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을 뜻했고, 횡의(橫議)한다는 말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이론을 멋대로 주장하는 것을 말했다. 승지 이경동의 말은 이심원과 남효원을 유학의 이단(異端)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도승지 임사홍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성종은 이경동의 말을 엄히 눌렀다.
"이들 무리를 붕당(朋黨)이라고 이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내버려 두고 국문하지 않는 것이 옳다.”
붕당(朋黨)의 붕(朋)은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하거나 벗들을 말하며, 당(黨)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모인 집단을 지칭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붕당(朋黨)은 죄악시되었고, 경국대전은 조정의 관원으로서 붕당을 맺어 조정의 정치를 어지럽히는 자는 모두 참(斬)하여 그 처자(妻子)는 종으로 삼고 재산은 관(官)에 몰수한다고 규정하였다. 붕당에 대한 극히 부정적인 시각은 조선 중기 이후 변화를 가져와, 붕당을 학맥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형성된 집단을 일컫는 말로 바뀌었다.
이경동은 다시 나섰다.
"전하, 효온의 상소가 심원의 상소와 서로 통하여 같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한 손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성종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효온이 비록 심원과 함께 의논하여 상소를 썼을지라도, 어찌 억측으로 국문할 수 있겠는가?"
이경동이 임금의 꾸지람을 듣고 주춤하자, 성종은 화제를 바꾸어 남효온의 상소를 읽으며 마음에 걸렸던 것을 신하들에게 물었다.
“소릉을 폐한 것은 선왕 때의 일이므로 이를 복원하기 어렵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영사 정창손이 나서서 대답하였다.
"신이 그 상소를 보니 말이 지나쳐서 놀랐습니다. 특히 소릉 복원은 진실로 채택하여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경동이 다시 나서서 남효온의 상소를 비난했다.
"효온이 이르기를, 도(道)를 배우고자 하나 저 사람은 도가 없고, 학업을 묻고자 하나 저 사람은 학업이 없다고 하였으니,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와 같은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종은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과연 스승이 될 만한 자가, 지금 성균관에 없는가?"
영사 심회가 나서서 말했다.
"신이 들은 바로도 선비들이 성균관에는 한 사람도 가르침을 맡을 자가 없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사헌부 장령이 성균관의 실정을 아는 대로 말했다.
“성균관 안에 가르치기를 부지런히 하는 자는 과연 없습니다. 성균관 대사성 권윤은 물론이고, 동지사 홍경손과 임수겸 등은 오래 그 직임에 있었으나 후학(後學)을 성취시킨 업적이 없습니다. 경학에 밝고 행실이 곧은 자를 골라서 성균관의 장관 벼슬을 맡게 하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성균관은 정 3품 대사성(大司成)과 20여 명의 교수직을 두어 유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대신으로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뽑아서 정 2품 성균관 지사(知事)와 종 2품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게 하여 돌아가면서 차례로 유생들을 가르쳤다.
승지 이경동은 남효온의 상소 내용을 문제 삼아 죄를 묻게 하려고 아뢰었는데, 오히려 상소 내용이 성균관에 대한 바른 지적이라고 좌우에서 말하니 당황하였다. 이경동이 아뢰었다.
"이제 만약 성균관 대사성 등의 벼슬을 바꾸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생(書生)의 상소로 인하여 쫓겨났다고 할 것입니다.”
임금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하지만 나라의 인재를 길러내는 성균관에 좋은 스승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