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관 부제학 유진(兪鎭)은 남효온의 상소를 전해 듣고 가슴이 철렁하였다. 유진은 임금에게 급히 나와서 아뢰었다.
"남효온의 상소에 누이를 포용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필시 신(臣)을 가리킨 말입니다. 신의 매부 조염은 바로 역적 이시애의 외사촌 동생인데, 이시애와 조염이 죽자 온 집안이 박살 났으므로 신이 누이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누이에게 딸이 하나 있으나 정조를 잃어, 갑사 장순손의 아내가 되었다가 장순손이 버리자 의지할 곳이 없어서 남대문 밖 빈집에 기거하였습니다. 사헌부에서 이로써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의심하여 허물을 책망하였는데, 특별히 천은(天恩)을 입어 단지 장(杖) 80대에 처하였습니다. 이제 누이는 신의 안성 농가에 살고 있는데도 남효온이 신을 가리켜 한 명의 누이를 포용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신이 처벌을 기다리며 피혐을 청합니다.”
"이는 지나간 일이니, 피혐하지 말라.”
남효온의 상소로 성균관도 발칵 뒤집혔다. 성균관 동지사 홍경손과 대사성 권윤 등은 함께 상소를 올렸다.
"신들은 학문이 본래 천박한데 오래 스승의 자리를 더럽혔으므로 항상 부끄러움을 품었습니다. 지난번 남효온의 상소가 바로 신들의 부족함을 정확히 지적하였으니 더욱 부끄럽고 두려움이 간절합니다. 학교는 풍속과 교화가 나오는 곳이므로, 마땅히 재주와 덕을 겸비한 자를 뽑아서 자리에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신들이 뻔뻔스럽게 벼슬에 있으니, 마음이 진실로 편치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신들의 벼슬을 파(罷)하소서."
임금은 유생의 상소로 성균관의 스승을 바꾸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거정은 남효온의 상소가 성균관에 대한 지독한 모욕이라고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서거정도 성균관의 동지사를 겸임하며 유생을 가르치고 있기에 더욱 수치스러웠다.
‘스승을 무시하는 이런 천박한 풍조를 두고 볼 수 없다. 더구나 남효온은 세조 때의 신하를 쓰지 말라고 주장한 이심원과 같은 미친 서생(書生)의 무리가 아닌가.’
한명회도 서거정을 궁궐에서 만나 이심원과 남효온의 상소에 대해 분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이들이 소릉 복위를 주장함은 세조를 비난하는 일이고, 세조 때의 공신을 쓰지 말라고 말함은 세조의 공을 부정하고 훈구대신인 우리들을 비난하는 것이야.”
서거정도 한명회의 분노에 호응하였다.
“요즘 젊은 선비들은 미친 사람 마냥 자신들의 어리석은 주장만 내세우고, 오래된 제도와 나이 든 연장자는 이유 없이 무시하니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하는 것인지......”
“이심원과 남효온은 서로 공모하여 상소를 올린 것이 틀림없네. 조정과 사직을 어지럽히는 미친 선비들은 아예 싹을 끊어야 하네.”
한명회는 가늘게 눈을 뜨며 성긴 턱수염을 손으로 꼬았다. 한명회는 이심원이 훈구대신들을 조정에서 다 내쫓아야 한다는 주장과 남효온이 소릉 복위를 주장한 것은 세조 때의 업적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니, 결국 훈구대신들의 안위에 직결되는 문제라고 여겼다. 한명회는 이심원과 젊은 선비들의 주장을 망령되고도 위험하다고 여겼고, 세조 때를 부정하는 주장에 대해 붕당 죄로 몰아 일벌백계하려고 하였다.
‘이런 주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반드시 엄히 다스려야 하리라!’
성종 9년 4월 20일, 성균관의 동지사 서거정은 경연에서 남효온이 올린 상소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성균관은 예의와 풍속의 교화가 나오는 근원입니다. 남효온의 상소는 실로 스승을 업신여기고 비웃고 있습니다. 사람은 아버지가 낳아서 기르고 스승이 가르치며 임금이 먹여 살리는 은혜로 살므로, 스승을 조롱함은 바로 아버지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풍습을 조장할 수는 없습니다. 남효온도 성균관에서 배운 자이니, 유진이 오래 스승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가르침을 받았을 것인데, 유진의 행동을 극언하였습니다. 만약 이를 징계하지 아니하면 이를 본받아 그릇된 풍속이 되어 장차 막을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입니다.”
"남효온의 말이 지나쳤음을 과인이 잘 알고 있소. 특히 소릉을 다시 세우는 일은 신하로서 할 수 없는 말이오.”
서거정은 남효온을 처벌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국가의 일을 대간과 조정의 신하가 말하는 것은 가하거니와, 남효온은 한낱 유생으로서 감히 말하였습니다. 큰소리 내기를 좋아하여 이름을 얻으려는 계책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 같은 천박한 신진 선비에게 죄를 물으소서.”
좌승지 손순효도 서거정을 거들었다.
"효온의 상소와 심원의 상소가 추천하는 인물이나 주장이 서로 같으니, 일당인 듯합니다."
서거정은 손순효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남효온과 이심원의 일당을 붕당의 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아뢰었다.
"전국시대의 말기에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있던 처사들이 도리에 어긋나는 논의나 비평을 많이 하자 천하가 어지러워졌고, 한나라 말기에 선비들이 붕당(朋黨)을 이루었는데 신은 한나라가 이 때문에 쇠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대저 한낱 선비가 사람의 잘잘못을 비평하고 천하 국가를 의논하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들을 국문하시어......”
성종은 서거정의 말을 자르고 단호히 말했다.
“승정원에서도 국문하기를 청하였으나 과인이 이미 구언(求言)하였기 때문에 윤허하지 아니하였소. 만약 국문하여 죄를 주면 신하가 감히 말하지 못하여 백성의 사정을 들을 길이 없어질까 두렵소.”
이번에는 영사 한명회가 나서서 아뢰었다.
"소릉을 다시 세우는 일은 신하가 감히 말하지 못할 바입니다. 청컨대 국문하소서.”
성종은 훈구대신들이 함께 달려들어, 젊은 선비들의 잘못에 대해 엄하게 처벌하자는 주장을 하니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구언(求言)을 하고서, 이에 답한 상소 내용을 가지고 죄인으로 삼아 국문하는 것이 어찌 옳겠소?”
대사간이 나서서 아뢰었다.
"전하께서 이미 구언(求言)의 전교를 내렸으므로, 말이 옳은 것은 쓰고 옳지 못한 것은 버리면 됩니다. 이제 만약 이 일로 국문하면 여러 신하들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을 것이니, 남효온의 말을 죄주는 것은 불가(不可)합니다."
“대사간의 말이 옳다!”
한명회와 서거정은 대사간을 쏘아보았다.
성종 9년 4월 24일, 임금이 남효온의 상소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결론을 내린 지 나흘 후였다. 한명회는 경연에 참석하면서 도포자락을 털며 중얼거렸다.
“남모라는 유생은 내가 관심이 없으나, 이심원은 이번 기회에 반드시 꺾어야 한다!”
영사 한명회는 가슴에 품은 말을 경연에서 작심하고 아뢰었다.
"전일에 심원이 올린 글에 이르기를, 세조 때의 공신은 쓸 수 없다고 하였으니, 노신은 이를 듣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조는 중흥한 불세출의 임금이신데, 심원이 어느 신하를 가리켜서 쓸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고 세조의 공신은 모두 쓸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신은 매우 통분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성종은 한명회가 뜬금없이 이심원이 상소에 쓴 내용을 들먹이자 긴장했다. 성종은 한명회가 갑자기 이심원의 상소에 대해 꺼내는 이유를 짐작했다.
‘필시 남효온과 이심원을 엮어 붕당으로 몰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성종은 한명회의 말을 가볍게 받아쳤다.
"심원의 상소를 읽고 과인이 만나서 그 뜻을 이미 물은 바이오. 심원이 말하기를, 공신이 만약 죄를 범하여 벌을 주면 은혜가 상할 것이고, 벌을 면하게 하면 의가 상하게 되니 이 때문에 쓸 수 없다고 하였소. 심원의 말은 깊은 뜻이 없는 것이오.”
“세조 때의 공신을 쓰지 말라고 말한 것은 필시 세조 대왕을 비난하고 헐뜯은 것입니다.”
성종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심원의 상소는 세조 대왕을 배척한 것이 아니고, 다만 세조 때의 공신을 쓰는 것이 불가하다 한 것이오!"
성종은 신하였던 훈구대신들에 대한 탄핵이 세조에 대한 평가와 함께 한다고 주장하는 한명회를 나무라며 반박했다. 임금이 세조와 세조 때의 공신을 분명히 구분하여 말하자 한명회가 주춤하며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남효온은 글을 올려 소릉을 복원하자고 말하였다 합니다. 남효온이 심원과 더불어 사귀었기 때문에 그 말한 바가 서로 같으니, 이들의 주장을 점점 자라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대사헌 유지가 한명회의 주장을 거들었다.
"소릉을 복위하고 세조 때의 공신을 임용하지 못하게 한 등의 말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서로 무리 지어 붕당을 이루어 자기편의 생각을 두둔하는 형상이니, 청컨대 국문하소서.”
유지(柳輊)는 도승지 시절 한명회가 유자광과 대간에게 탄핵을 받았을 때, 한명회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도승지 자리에서 물러나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갔다. 이후 임기를 마친 후, 형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말했다.
"그들이 말한 바가 비록 이치에 맞지 않을지라도 이미 구언(求言)하였는데 국문하는 것이 옳겠는가? 이는 언로를 막는 일이다. 또한, 저들이 설사 붕당을 하였을지라도 능히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 선비의 어리석은 일을 어찌 국문까지 해야 하겠는가?”
사관 안윤손은 임금과 대신들의 대화를 기록하다가 젊은 유생들에게 붕당의 죄까지 물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자 놀라 붓을 멈추었다. 안윤손은 용기를 내어 붓을 놓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성명(聖明)하신 주상의 밑에서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다만 남효온과 강응정, 박연 등 약간 명이 소학계를 만들어, 소학의 도(道)를 실천한다고 하면서 때때로 여럿이 모여서 강론하며, 강응정을 공자라고 일컫고 박연을 안연이라고 하면서 서로 높이고 혹은 희롱하고 한다지만, 유생으로 한 때의 비웃을 일에 불과합니다.”
안윤손은 26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이 된 급제 3년 차였다. 안윤손은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당시 선비들 사이에 이름이 높은 남효온의 생각과 사상에 연대감을 가졌다. 훗날 안윤손은 내수사(內需司)의 혁파 등 남효온이 상소에서 주장한 내용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임금에게 건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