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은 음험하여 밖으로는 기개가 있고 곧은듯하나 안으로는 아첨하고 간사하여, 소인의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살피지 아니하고 신임하기를 너무 중하게 한 때문에, 명성과 위세가 커졌으니 누가 감히 나를 말하겠느냐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더욱 거리낌이 없이 감히 주상 앞에서 재이는 두려울 것이 없고 대간의 말은 들을 것이 못된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하의 분별력을 업신여기며 농간하는 것입니다. 신들은 듣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임금은 도승지를 소인이라 공격하는 상소를 보자 얼굴이 붉어졌다. 현석규를 소인이라고 탄핵하여 대간들과 따지며 다툰 일이 떠올랐다. 유지와 현석규에 이어 또 도승지가 탄핵을 당하니 난감하였다.
‘이번이 세 번째가 아닌가.’
임금은 다시 상소에 눈을 가져갔다.
“육조의 일을 모두 승정원이 총괄하는데, 임사홍이 장(長)이 되어 나라의 권세가 그 손에 달려 있습니다. 임사홍은 방자하여 꺼리는 바가 없고, 자기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자 대간으로 하여금 그 허물을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백 가지 꾀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대간에서 술을 금하기를 청하거나, 혹은 종친들과 활을 쏘는 일에 대해 말하자, 임사홍이 소인의 마음으로써 전하의 마음이 대간의 요청을 번거롭게 여겨 싫어하리라 생각하고, 은밀히 아뢰어 대간을 배척하고 전하의 뜻을 시험하고자 한 것입니다. 신들이 생각하건대, 전하의 총명하심으로써 간사함과 바름을 밝게 아실 것인데, 어찌 임사홍의 간사함을 알면서 내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상소는 작년 가을에 거론되었던 공주의 사치스러운 집을 들먹이며 임사홍이 소인임을 증언하였다.
“사간원과 사헌부의 대간이 경연에서 임사홍 아들 집의 일을 논하자, 임사홍이 분노하여 대사헌을 꾀어, 곧 양사(兩司)로 하여금 모두 모이게 하여 한 사람 한 사람 단독으로 아뢴 잘못을 꾸짖고 아울러 그 아들 집의 일을 꾸짖었습니다. 대간들은 면전에서 꾸지람을 받으면 자리를 옮기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임사홍은 이로써 고분고분하지 않은 대간들을 다 내보내고자 도모한 것입니다.”
임금은 놀란 마음을 애써 누르고, 상소를 계속 읽었다.
"임사홍은 전하께서 직접 물으실 때, 간관들을 꾸중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간하는 일에 대해 약속한 것이라고 감히 주상을 속였습니다. 만약 참으로 약속하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사간원에서 아니하고 양사(兩司)로 하여금 함께 모이게 하였겠습니까? 예로부터 양사가 함께 앉아 한 사람 한 사람 꾸짖으면서 약속한 일이라고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는 전하를 속이는 말이며, 무릇 대간의 말이 자기에게 관련된 것은 모두 물리치려는 술책입니다. 조정을 가볍게 여김이 이처럼 심하니, 참으로 개국한 이래로 이 같은 간사함이 없었습니다.”
성종은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신들은 생각하건대, 재변이 일어나는 것이 비록 어떤 일로 인함인지 확실하게 가리킬 수 없으나, 공주의 지나치게 화려한 집으로 백성들의 원망을 사는 이유도 있는 듯합니다. 임원준의 아들은 승정원의 장(長)이 되었고 손자는 공주에게 장가 들어서 안팎으로 얽혀 권세를 잡자, 소인배들이 바람을 따라가듯 그들에게 붙고 따르니, 뜻있는 선비들은 한탄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간사하고 불충한 자에게 경계가 되도록 임원준 부자를 내치어 멀리 유배 보내소서.”
성종은 붉어진 얼굴로 상소를 덮었다.
“사정을 잘 모르면서 도승지를 소인이라고 욕하고, 아들을 탄핵하면서 아버지까지 공격하는 것은 실로 도가 지나치다.”
성종은 상소를 승정원에 내리지 않았다. 대간들이 상소를 보게 되면 그 이후의 정국은 현석규 때 이미 겪어본 것이었다.
성종은 가슴이 답답하였다. 양관의 관원들이 합동으로 간신이라고 지목하며 당장 유배를 보내라는 임사홍은 가장 가까운 신하인 도승지이고 선왕의 딸인 현숙 공주의 시아버지였다. 성종은 즉위하면서 예종의 양자가 되었으니, 공주는 친남매와 다름이 없었다.
임사홍은 임금이 부르기를 기다렸다. 임금이 상소를 다 읽고도 승정원에 상소를 내리지 않고 자신을 부르지도 않자, 참지 못하고 곧바로 어전으로 나아갔다. 임사홍은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에 대해 말한 바를 주상께서 이미 자세히 아실 것이니 다시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외방에서 금년 보리농사가 매우 잘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가뭄의 재해는 없는데 갑자기 금주령을 내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신이 승지들과 함께 의논하여 아뢴 것뿐입니다.”
임금은 임사홍이 승지들과 의논해서 아뢰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임사홍은 대간이 공주의 집을 탄핵한 일에 대해서는 발뺌을 했다.
“가옥의 칸수의 한도에 더하여, 척수(尺數)로 집 크기의 한도를 정하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한 것은, 공주의 집을 위해 말한 것이 아닙니다. 대체로 법이 세밀할수록 간사함이 더욱 심한 것인데, 국가에서 이미 법으로 칸수를 정하였으니, 비록 세밀하게 척수의 법을 세울지라도 법 밖에 남은 간사함이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승지들과 의논하여 아뢴 것입니다. 신이 사헌부에서 공주의 집을 가리켜서 말한 것임을 알았다면, 신이 어찌 의논에 참여하였겠습니까?”
임사홍은 임금의 표정을 살피며 관복 소매자락에 입을 대고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 다시 아뢰었다.
“또 신은 흙비가 재변이 아니며 하늘의 꾸짖음에 대해 삼가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큰 가뭄과 홍수가 나는 재변과 같지는 아니하므로 하늘을 두려워하며 반성하는 공구수성(恐懼修省)할 일은 아니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제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신(臣)때문에 신의 아비를 아울러 탄핵하니,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신이 자리에서 물러나 죄를 기다리기를 청합니다.”
성종은 도승지에게 피혐을 허락하지 않고 물러가게 하였다.
성종은즉위 초부터 임사홍을 귀하게 여겼다. 즉위한 직후 원상들에게 조정의 젊은 관리 중에 누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지 물었더니 임사홍을 천거받았다. 임사홍은 스물한 살의 나이로 과거에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고 학문과 문장도 뛰어났었다. 경연관으로 뽑았을 때 재상들이 금주령을 어기고 손님을 접대할 때 거리낌 없이 술을 마셨다고 당당하게 탄핵하였다. 그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여 사헌부 대간으로 발탁했더니 원상제 폐지를 주장하고 인사를 잘못한 한명회를 탄핵하기까지 하였다. 성종은 임사홍을 곧고 바른 신하로 보았고 조정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로 여겼다.
성종 9년 4월 28일, 양관이 상소를 올린 다음날 사간원 정언 성담년이 어전에 나아와서 아뢰었다.
"신들이 전하여 듣건대, 어제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연명하여 상소하여 임사홍을 논하였다고 하는데, 무슨 연유인지 알지 못하니 그 글을 보기를 청합니다.”
"양관의 상소는 그릇된 곳이 있어 전할 수 없다. 과인이 대간들과 아울러 홍문관과 예문관의 관원을 우선 만나 보겠다.”
성종은 성담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러나자, 승정원에 명하여 대간들과 양관의 관원들을 부르게 했다. 또한, 상소를 승정원에 내려 상소를 보기를 원하는 대간들은 어전에 나오기 전에 볼 수 있게 했다.
그날 오후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니, 대간과 홍문관, 예문관의 관원들이 부름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다. 정 3품 홍문관 부제학 유진을 필두로 연명 상소를 올린 양관의 관리 이십여 명과,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의 대간 십여 명이 입시하였다.
양사와 함께 홍문관의 관리들과 사관을 겸하는 예문관 관리들은 대부분 과거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여 청요직(淸要職)에 임명되어, 조정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비교적 젊고 패기 있는 관리였다. 청요직은 청직(淸職)과 요직(要職), 즉 깨끗하고 중요다고 일컫는 직책으로, 대개 삼사(三司)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과 예문관의 관원들을 포함했다. 이들 직책은 경연 등을 통해 왕을 자주 만날 수 있고, 왕과 대신들을 탄핵할 수 있어, 왕권과 재상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했다.
성종은 이들을 바라보면 언제나 사직의 기둥으로 여겨 든든한 마음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성종은 대사헌 유지(柳輊)에게 물었다.
"경은 홍문관과 예문관이 함께 올린 상소를 보았는가?”
유지는 어전에 나오기 전에 대사헌 관리들이 상소를 보고 임사홍을 탄핵하던 분위기를 그대로 아뢰었다.
"신들이 상소에서 임사홍이 말한 바를 보니,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말로써 성상의 총명을 막고 대간의 말을 저해하고 억제하였습니다. 신들은 놀라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으며 이러한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을 한스러워합니다.”
성종은 대사헌마저 임사홍에 분노하니 당황하였다.
‘대사헌은 도승지일 때 대간에게 지나친 말로 탄핵을 당해보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도승지를 변호하지 않고 심지어 탄핵에 적극 동조하다니 일이 만만하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