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준은 본래 간사하고 탐오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했으나 아뢸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임사홍을 논하면서 허물이 아비 임원준에게도 있으니 아뢴 것입니다.”
“임원준의 일은 이미 선대왕 때의 일이다. 지나간 일을 어찌 다시 들추어내겠는가?”
임금이 고개를 저으며 반발하자, 채수가 말했다.
"신들이 경연관인데, 임원준은 경연 당상관입니다. 진실로 신들과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임원준의 경연관의 직을 파하소서. 만일 임원준을 파면하지 아니한다면, 청컨대 신들을 파직시키소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관원들이 채수의 말을 거들며 함께 말했다.
"임원준의 일은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지금 죄를 물을 수 없으시다면, 청컨대 벼슬을 파하소서.”
"알았다! 마땅히 그대들의 말대로 하겠다.”
신하들은 일제히 왕의 결정을 치하했다.
"성상의 결단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성종은 양관의 관원들과 대간들이 물러나가는 것을 보며 마음이 무거웠다.
‘이번에도 도승지를 잃게 되는가.’
대간들과 양관의 간언을 귀하게 여겨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임사홍의 말은 실수가 있으나 죄를 물을 정도는 아니었다. 성종은 현숙 공주가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임사홍 때문에 임원준까지 연좌하여 죄를 물어서는 안 될 일이다.’
공주는 시아버지와 시할아버지를 위해 생모인 인혜 대비에게 읍소할 것이고, 그러면 인혜 대비와 아울러 인수대비, 정희대비의 세분 대비들은 임사홍 부자에 대한 조치를 섭섭하게 생각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성종은 임사홍이 자신에게 말한 것이 사관을 통해 홍문관과 예문관의 관원들이 알게 된 과정이 언짢고 못마땅했다. 더구나 양관의 관원들은 임사홍으로 인해 임원준까지 탄핵하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홍문관에 돌아온 부제학 유진(兪鎭)은 임사홍 부자를 탄핵한 것에 대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이 홍문관과 예문관이 연명하여 올린 상소의 수장(首長)이 아닌가. 홍문관에는 최고 직위에 영사(領事), 대제학(大提學), 제학(提學)이 있었으나 이러한 직책은 대신들이 겸직을 하였고, 정 3품 부제학은 홍문관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속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는 차에, 정 9품 홍문관 정자(正字)로부터 임원준의 전갈을 받았다.
“즉시 의정부에 들려달라고 하셨습니다.”
유진은 자신이 주모자가 되어 탄핵 상소를 올린 격이 되어, 임원준을 만나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안절부절못하였다.
궁궐 문을 나서니 육조거리가 펼쳐졌다. 바로 왼쪽 편에 의정부가 눈에 들어왔다. 유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의정부 건물에 들어섰다. 유진은 임원준을 만나자마자 변명하였다.
“저는 연명 상소에 반대했습니다. 채수와 표연말이 초안을 잡아서 가져왔기에 대감까지 거론하여 지나치다고 꾸지람을 하며 다시 의논하라고 하였습니다. 채수와 표연말, 이창신 등이 양관의 젊은 관원들을 부추겨서 그만..... 어쩔 수 없이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좌참찬 임원준은 유진을 만난 후 곧바로 어전에 나아와 임금을 알현했다.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兩館)에서 아들 임사홍의 일로써 신(臣)을 아울러 탄핵하며 신을 가리켜 간사하고 탐오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간사하다는 것은 마음에 있고 탐오하다는 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신이 비록 간사한 마음이 있을지라도 저들이 어찌 능히 알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의 사직을 허락하시고, 그들과 대질하여 묻게 하소서.”
임금은 부드러운 말로 임원준을 위로하였다
"어찌 남의 말을 듣고 대신을 가볍게 벌하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라.”
성종은 돌아서는 임원준의 처진 어깨를 보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임금은 좌승지 손순효에게 명했다.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임사홍이 소인임을 알면서 일찍이 말하지 아니하고 오늘에 이르러서야 말했다. 이는 임금의 덕을 받들어 높이려는 뜻이 없었으니, 모두 국문하게 하라!”
좌승지에게 임금의 명을 들은 좌부승지 홍귀달은 화들짝 놀랐다. 홍귀달은 현석규의 일로 승정원에서 파직을 당하였다가 복직한 후, 형조참의를 거쳐 최근에 임사홍과 함께 다시 승정원에 복귀하였다. 홍귀달은 좌승지 손순효에게 말했다.
“상소를 올렸다고 이십여 명을 모두 옥에 가두는 것은 주상의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는 일입니다.”
홍귀달은 손순효와 승지들과 의논하여 다급히 임금에게 나아갔다.
“대간들이 이르기를, 도승지 임사홍이 일을 아뢸 때에 올바르고 당당하게 반박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후설(喉舌, 목구멍과 혀라는 뜻으로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의 별칭)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하여 남에게 업신여기는 바가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신들의 벼슬을 해임시키소서.”
"경들은 사직하지 말라.”
임금의 신임을 확인한 후, 홍귀달이 말했다.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상소한 사람이 20여 명에 이르는데 함께 옥(獄)에 나아가서 변명하는 것은 편치 못한 일입니다. 또 말을 하였는데 도리어 견책을 당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곧 경연에 나가실 터인데 경연관인 이들이 없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청컨대 국문을 하지 마소서.”
임금은 승지들의 집단 사직은 말리면서도 양관의 관원들을 옥에 가두어 국문하지 말라는 청은 들어주지 않았다.
임금은 이조에 명했다.
"임사홍은 대간이 말하는 바가 지나치고 번거로우니, 마땅히 견책의 뜻을 보임이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무릇 그 말한 바가 언로(言路)에 방해됨이 있었으니, 벼슬을 거두어라. 홍문관과 예문관들의 벼슬도 파면하라. 양관의 관원들은 임사홍이 소인이며 임원준은 간사하고 탐오한 것을 이전부터 알면서 도승지와 좌참찬을 제수할 때에 세력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자못 임금의 덕을 높이려는 뜻이 없었던 것이므로 그들의 벼슬도 거두는 것이 마땅하다.”
임금이 내린 조치는 조정 안팎을 놀라게 하였다. 성종은 정승들과 육조의 참판 이상과 대간을 불러서 양관 관원들의 파면과 임사홍의 벼슬을 거둔 이유를 밝혔다. 사간원 정언 성담년이 임금의 설명을 듣고, 열에서 나왔다. 양관의 관원들을 옥에 가두고 국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대사간이 급히 성담년의 관복 자락을 잡으며 말렸다.
성담년이 어전에 물러나오면서 대사간에게 물었다.
“영감께서는 어찌 저를 말리셨습니까?”
“주상의 말씀대로라면 대간들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소. 우리도 임사홍과 임원준이 도승지와 좌찬성에 임명되었을 때 탄핵하지 않았으니 주상께서 이를 따지면 양관의 관원들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오.”
성담년은 마음이 무거웠다.
“주상께서 임사홍 부자에 대해 신임을 버리지 못하시니 양관의 관원들이 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갑자기 의금부의 옥에 갇히게 된 양관의 관원들을 놀라움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채수가 분한 마음을 가슴에 머금고 말했다.
“하(夏) 나라 우(禹) 임금은 바른말을 알리는 북을 설치하고서 번성하였고, 주(周) 나라 여왕(慮王)은 바른말을 탄압하다가 망했다고 배웠네. 성군(聖君)이신 전하께서 어쩌다가 소인 임사홍에게 이토록 미혹되신 것인가.”
표연말이 채수를 위로했다.
“임사홍이 크게 간사하니 전하는 그가 마치 충성스러운 듯이 보이고, 임사홍이 크게 속이니 믿음직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창신이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가 주상에게 끈질기게 말하여 임사홍을 끌어내리고 국문하도록 겨우 허락을 받았는데, 임원준까지 죄를 묻도록 너무 밀어붙여서 역린(逆鱗)을 거스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역린은 거슬러 난 비늘이라는 뜻으로, 군주의 노여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비자는 용의 목 아래에 직경 한 자쯤 되는 역린이 있어 만약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사람을 죽이고 마는데, 군주 또한 역린이 있다고 했다.
표연말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임사홍이 아무리 간사하다고 해도 성군이신 우리 임금의 눈을 이토록 멀게 하다니,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채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개 임사홍 같은 소인들은 거짓을 꾸며대기에 충분하고, 재주는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니, 비록 밝고 지혜 있는 임금이라 하더라도 현혹을 당하게 마련이네.”
김흔이 감옥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임사홍 부자 때문에 성덕(聖德)에 이토록 누를 끼치다니, 검은 구름이 밝은 해를 가리는 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