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다.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 검은 멱목(幎目, 시신의 얼굴을 덮는 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가까이서도 얼굴빛을 분변 할 수 없었다.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인조실록, 재위 23년 6월 27일)
역사의 기록은 명확히 세자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관은 붓을 들어 그런 정황을 과감히 기록했다. 당시 종친이 세자의 염습(斂襲, 시신을 씻겨 수의를 입히고, 베로 단단히 묶어 입관하는 절차)에 참여했다가 세자의 얼굴이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소현세자는 청국에서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병에 걸려, 사흘 만에 숨을 거뒀다. 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조정 내외에 의혹을 가져왔다. 우선 학질에 걸렸다는 것부터 의심스러웠다. 학질은 모기를 매개체로 걸리는 병인데 세자는 여름도 아닌 봄에 이 병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실록은 세자가 병이 든 것을 상세히 기록했다.
“세자가 병이 났다. 어의(御醫) 박군(朴頵)이 들어가 진맥을 해보고, 학질로 진찰하였다. 약방(藥房)이 이형익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니, 주상이 따랐다.” (인조실록, 재위 23년 4월 23일)
“세자가 침을 맞다.” (인조실록, 재위 23년 4월 24일, 25일)
“왕세자가 창경궁 환경당(歡慶堂)에서 죽었다.” (인조실록, 재위 23년 4월 26일)
사관은 세자의 병에 침과 약을 함부로 써서 죽게 만들었다고 의원들을 비난했다.
“세자가 10년 동안 타국에 있으면서 온갖 고생을 두루 맛보고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다. 의관(醫官)들이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 세자의 향년은 34세인데, 3남 3녀를 두었다.”
영화는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영화는 가상의 인물 맹인 침술사 천경수가 궁궐에 들어가 침술 전문 의관이 되어 소용 조씨와 인조의 사주로 이형익이 소현세자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맹인 침술사는 낮에는 장님이지만 올빼미처럼 밤에는 볼 수가 있었다.
인조는 과연 아들을 죽였을까?
충분히 개연성은 있다. 인조는 청나라가 아들을 앞세워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세자는 청나라 조정의 호감을 얻고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원나라가 왕을 바꾼 역사가 있지 않은가. 더구나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에 따른 패배의식과 열등감으로 신민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인조와 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조와 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비슷한 점이 있다. 두 국왕은 모두 중대한 실정을 범했고, 세자들은 부왕을 대신하여 왕실의 체면과 왕권을 세웠다는 공통점이 있다.
더구나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에 대해 끊임없이 험담을 하는 과정에서, 아들을 잠재적 왕의 찬탈자로 간주하는 인조의 망상은 커지게 되었다. 실록은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와 인조사이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히고 있다.
“주상의 행희(幸姬, 치우친 사랑을 받는 여인) 소용 조씨(趙昭容)는 세자와 세자빈과 본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밤낮으로 주상의 앞에서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없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꾸며서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하였다.” (인조실록, 재위 23년 6월 27일)
세자를 치료하다 죽게 만든 이형익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의가 자신이 치료하는 왕이나 세자가 죽으면, 그 죄를 물어 종종 목숨을 잃는다. 치료한 정성을 높이 사서 죄가 감해진다고 해도 유배형에 처해지곤 한다. 가까운 예로 효종의 어의 신가귀가 왕을 살리지 못하자 사형에 처해졌고, 경종의 어의 이공윤은 사형이 감해져 유배를 떠났다. 그러면 소현세자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결국 죽게 만든 이형익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자가 죽은 후 사헌부와 사간원이 치료를 맡은 어의 이형익을 엄벌에 처할 것을 청했다.
"왕세자의 병증이 하루아침에 악화되어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뭇사람의 생각이 모두 의원들의 진찰이 밝지 못했고 침놓고 약 쓴 것이 적당함을 잃은 소치라고 여깁니다. 의원 이형익은 일찍이 세자를 진찰하던 날에 망령되이 자기의 소견을 진술했는데, 세자께서 오한이 심하여 몸이 떨리는 증세가 난 이후에는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습니다. 신중하지 않고 망령되게 행동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형익을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고 증후를 진찰하고 약을 의논했던 여러 의원들도 아울러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인조실록, 즉위 23년 4월 27일)
인조는 이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대간들이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끝내 이형익을 보호했다. 이 때문에 인조는 이형익에게 지시하여 세자를 죽게 만든 사람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을 받았다.
소현세자의 자식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영화에는 10살 된 원손 한 명이 나오지만 실제 세자의 아들은 세명이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지 1년 후 세자빈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에 귀양을 보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인 이석철, 이석린, 이석견을 제주에 유배하였다. 석철은 12세, 석린은 8세, 석견은 4세였다.” (인조실록, 재위 25년 5월 13일)
세자의 어린 아들들이 제주에 도착한 날, 사관은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며 왕의 몰인정함을 은근히 비난하는 글을 실록에 남겼다.
“사신은 논한다. 옛날 회남왕(淮南王) 장(長)이 모반하다가 폐위되어 촉(蜀) 땅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죽자, 문제(文帝)는 종신토록 후회하였다. 지금 석철 등이 비록 국법에 있어서는 마땅히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무슨 아는 것이 있겠는가. 그를 독한 안개와 뜨거운 기운이 나는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만약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한다면 성상의 자애로운 덕에 누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소현 세자의 영혼이 또한 깜깜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인조실록, 재위 25년 8월 1일)
1년 후 원손 이석철이 제주에서 죽자, 인조는 관(棺)을 호송해 와서 세자의 묘 곁에다 장사 지내게 하라고 명했다. 사관은 인조의 명을 실록에 남기며 마음에 있는 말을 더했다.
“사신은 논한다. 석철이 역모를 한 강빈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손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어 결국은 죽게 하였다. 그 유골을 아버지의 묘 곁에다 장사 지낸들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인조실록, 재위 26년 9월 18일)
세자의 큰 아들이 죽은 3개월 후, 그해 12월 23일에 둘째 아들도 제주 유배지에서 잇따라 죽었다.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인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소현 세자의 셋째 아들을 제주에서 함양으로, 또 도성이 가까운 강화로 유배지를 옮겨주었다가 훗날 경안군으로 작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경안군의 후손들이 오늘날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를 이루었다.
영화 포스터를 보면, 인조 유해진은 맹인 침술사 유준열의 한쪽 눈을 가리고 있다. 영화의 메시지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내고 있다. 맹인 침술사는 “저희같이 천한 것들은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라고 영화 속에서 말한다. 정의가 살아있지 않은 세상에 억압받는 사람들의 생존술이다. 나아가 공정하고 더 나은 세상을 갈구하는 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