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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Jan 23. 2023

영화 <교섭>과 조선왕조실록

국가의 녹을 먹는 자의 국민에 대한 책무는 무엇인가

 영화 <교섭>은 국가와 공무원이 국민에 대한 책무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국민의 종, 공복(公僕)이라 불리는 공무원, 영화 속 공무원 황정민과 현빈은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빠트리면서까지 고군분투한다. 영화 포스트의 메시지 글귀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이다. 영화는 국민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국가는 어떤 자세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영화를 보고 나서 자연히 드는 감정. 영화 밖의 현실은 어떤가? 국민의 생명을 지킨 공무원의 미담을 우리는 얼마나 가졌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듯, 이런 일은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늘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일은 역사 속에서도 지금도 진행형이다.


 우리 역사상 교섭을 생각하면 전쟁이 아닌 협상으로 거란족 요나라에게 땅을 얻어낸 서희(徐熙), 병자호란 때 한양의 지척까지 쳐들어 온 여진족 청나라와와 교섭하며 군대의 진격을 지연시킨 최명길이 떠오른다.


 인조 14년 병자년 겨울, 청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한다. 빠른 기동 작전으로 청나라 군이 도성 밖 지척까지 몰려온 상황에서 최명길은 "저들의 요구사항을 물어보며 시간을 끌겠다."라고 사신을 자청해 목숨을 걸고 청나라 군 장막을 찾아가 교섭을 하였다. 그 덕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할 시간을 벌었다.


 최명길이 죽자 그를 주화론자로 비난하던 사관도 이점은 평가하였다.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인조실록, 재위 25년 5월 17일)  

 

 고려 성종 때 거란 군이 쳐들어왔을 때 서희 장군은 협상으로 그들을 물리친다. (서희는 당시 문관 직에 있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장군은 아니라는 입장도 있다.) 고려를 침입한 거란군의 총대장 소손녕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죽일 것이라고 고려를 협박하였다. 이어 소손녕은 고려가 보낸 방어 군대의 선봉장을 붙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소식이 함께 전해지자, 고려 조정은 패닉에 빠졌다. 서경 이북의 땅을 내어주는 조건으로 전쟁을 막자는 주장이 우세하였고, 고려 성종도 서경의 쌀을 버리도록 명을 내렸다.


 서희는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여 아뢰었다.

 "먹을 것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갑자기 쌀을 버리려 하십니까? 이번에 서경 이북의 땅을 내주더라도 삼각산 이북은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앞으로 저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면 다 내주시겠습니까?"


 서희는 거란과의 교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향했고. 소손녕의 장막으로 갔다. 소손녕은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거란의 것이다"라고 하며 고려 정벌의 명분을 말했다. 서희는 "그렇지 않소. 우리 고려는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요. 그래서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부르고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을 서경으로 국도로 정한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소손녕은 "고려는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도 어째서 바다 건너 송나라와만 교류하고 있는가?"라고 본색을 드러냈다. 즉, 거란은 송나라와 전쟁이 발생할 때 배후에 있는 고려가 근심거리였다. 거란의 속마음을 간파한 서희는 "고려와 거란 양국의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오." 하며 "만일 우리가 여진을 쫓아내고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여 그곳에 성과 보를 쌓아 길을 통할 수만 있다면 어찌 귀국과 국교를 통하지 않겠소?"라 하였다. 서희의 애초 목적은 거란군의 철수였으나 거란과의 협상에 성공하여, 항복하여 서경 이북 땅을 잃는 것이 아닌, 오히려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이후 서희는 군사를 이끌고 가서 여진을 쫓아내고 압록강 부근 흥화진, 통주, 곽주, 귀주 등에 성을 쌓았으니 이것이 강동 6주이다.


 조선 단종 때 의정부는 고려의 충신들을 고려왕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도록 청하면서 서희의 공적을 임금에게 보고했다.

 “서희는 거란의 소손녕이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한다고 침입하였을 때 고려 성종이 서경(西京) 이북의 땅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고 화의를 하려고 하여 서경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풀어 대동강에 던져 버리고자 하였습니다. 서희가 불가함을 여러 차례 말하고는 자청하여 소손녕의 진영에 가서 거듭 논설하여 힐난하니, 그 말하는 기품이 강개 하였으므로 소손녕이 강제로 하지 못할 것을 알고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습니다.” (단종실록, 즉위년 12월 13일)


 조선시대에 만고도목(萬古都目)이라는 놀이가 있었다. 조선의 선비들이 역사 인물 모두를 인재풀로 하여 이상적인 벼슬 군을 구성하는 놀이다. 만고도목 놀이를 할 때 외교를 담당하는 예조판서 자리에는 언제나 서희였다. 육당 최남선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고도목 놀이에서 지식인들이 고른 역사상 인물 중 최고의 대신들을 잡지 ‘청춘’에 수록했다.


 총리에 을파소(고구려), 외부대신 서희(고려), 내부대신 팽오 (단군조선), 육군대신 을지문덕(고구려), 해군대신 이순신(조선), 학부대신 설총(신라), 농상부대신 흘우(백제), 궁내부 대신 이제현(고려) 등으로 단군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역대 인물들을 총망라해 내각을 구성했다.


* 필자의 <교섭> 영화리뷰는 https://brunch.co.kr/@f15fe14ca9c24c2/328 이다.




 (사진 출처: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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