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신(黃守身)은 황희 정승의 아들이라는 든든한 배경으로 과거를 보지 않고도 벼슬길에 올랐다. 조선 개국 이래 처음으로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도 도승지에 오르고 영의정도 지냈다. ‘유방백세 유취만년(流芳百世 遺臭萬年)’이란 말이 있다. 꽃다운 향기를 가진 명성은 백 세대, 즉 삼천 년 가량 입에 오르내리지만, 더러운 악취를 풍기는 이름은 만년을 간다는 뜻이다.
영의정 황수신이 죽자, 사관은 그의 죽음을 실록에 기록하며 일생을 평하였다.
“황수신이 졸(卒)하였다. 황수신은 익성공 황희의 아들이다. 음직(蔭職)으로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우부승지에 제수되어 도승지까지 되었다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뒤에 복직하여 형조 참판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나갔다가 의정부 우참찬과 좌참찬,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정승이 되었으나 정사를 밝게 일으킴은 없었고, 뇌물을 받는 것이 지나쳐 한 이랑의 밭이나 한 사람의 노복조차 탐하고 다투어, 여러 번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황수신을 두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이 황(黃)이니, 마음도 황(黃)하다.’고 하였다." (세조실록, 재위 13년 5월 21일)
사관은 황수신의 죽음 앞에서 금수저로 최고의 벼슬에 올랐으나 크게 조정에 도움이 되는 일은 하지 못했고 뇌물만 밝혔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성이 황이니 마음도 황’이라며 황수신을 아량이 좁고 금전적으로 매우 인색한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말인 ‘노랑이’로 비하하기까지 했다.
사관이 지적한 도승지를 지내다 파직당한 일은 황수신이 인사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도승지 황수신이 임원준을 마음대로 7품 직을 주었다. 사헌부에서 그 일을 적발하여 아뢰자, 황수신과 임원준, 그리고 이조의 인사 책임자들을 의금부에 내리어 국문하게 하였는데, 명하여 황수신과 임원준의 직첩을 박탈하였다.” (세종실록, 재위 29년 9월 7일)
사간원은 임금의 조치가 너무 가볍다고 어전에 함께 나와 아뢰었다.
"황수신은 임원준의 청탁을 받아 함부로 인사비리를 저질렀으니 죄가 진실로 작지 않은데, 특별히 죄를 감하여 직첩만을 거두었고, 이조의 당상은 도승지가 청하는 대로 부당하게 사람을 썼는데, 석방해 버리고 죄주지 아니하였습니다. 신들은 생각하기를 이같이 하면 죄를 지은 악한 자를 징계할 수가 없겠나이다."
세종은 사간원의 말을 옳게 여겼으나 재상 황희를 거론하며 변명했다.
"이번 일로 이조의 대신들을 여러 날 붙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징계함이 족할 것이다. 그대들이 수신(守身)의 일을 말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늙은 대신의 아들인데 어찌 우대하는 의리가 없겠는가." (세종실록, 재위 29년 9월 13일)
황희 정승은 못난 아들 때문에 낯이 뜨거웠으리라. 황희는 황수신 때문에 이미 속을 많이 썩었다. 황수신이 학문보다는 기방출입에 몰두하자 여러 차례 엄히 꾸짖었으나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날 아들이 또 기생집에 갔다고 하자, 황희는 관복을 차려입고 문 앞에 기다리며 귀가하는 아들을 맞이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집으로 오던 황수신은 아버지를 보고 깜짝 놀라 엎드려 연유를 물었다. 황희는 아들에게 ‘그동안 나는 너를 아들로 대했는데 도대체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네가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너를 손님 맞는 예로 대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호랑이 부모 밑에 개가 태어나진 않는다는 말이 있다. 훌륭한 부모 밑에는 못난 자식이 없다는 뜻으로, 부모가 훌륭하면 자식들은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우며 자라 못날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황희정승의 아들 황수신은 이 말의 예외로 역사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