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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Feb 14. 2023

집단지성으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세조

중인지지(衆人之智) 하면 가이측천(可以測天)이라는 말이 있다

 세조 재위 13년 5월, 함길도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다.

 “함길도 길주 사람인 이시애가 그 아우와 더불어 반역을 모의하고, 먼저 절도사 강효문을 죽이고 그 머리를 뜰의 나무에 매달았다.” (세조실록, 재위 13년 5월 16일)


  북방에서 난(亂)을 일으킨 이시애는 함길도 길주를 기반으로 한 호족으로 아전과 백성을 규찰하는 일을 전담하여 토호들이 자주 모이는 유향소(留鄕所)를 중심으로 민심을 선동하고 동조 세력을 널리 모았다.  이시애는 군사를 모아, 길주를 습격해 함길도 병마절도사와 길주 목사를 살해했다. 조정이 혼란을 겪으며 반란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토호와 군민 등 반란군 2만여 명은 함길도 전역의 고을 수령들을 대부분 죽이며 단천과 북청을 공략하고, 뒤이어 함흥을 점령했다.

 

 심각한 보고가 잇따르자 세조는 토벌군을 편성하고 전국에 징집령을 내렸다. 토벌군은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총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임금이 이시애를 토벌할 방략(方略)을 의논하고, 귀성군 이준을 함길도·강원도·평안도·황해도 4도(道)의 병마 도총사로 삼고, 조석문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세조실록, 재위 13년 5월 17일) 


 도총사(都摠使) 귀성군 이준과 강순(康純)과 남이(南怡) 등 당대의 명장들은 북방으로 진군을 했으나 마천령이라는 험준한 지세에 막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갑사 유자광은 속전속결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신(臣)이 망령되이 이르거니와, 장수가 된 자들이 부귀나 탐하고, 죽고 사는 것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고, ‘이제 여름을 맞아 활의 힘이 약해졌고, 비가 많이 내려 강이 가로막고, 산천의 기세가 가파르고 험하고 초목이 무성하니 경솔하게 진격할 수도, 경솔하게 싸울 수도 없다.’고 서로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만 홀로 여름이고 적은 여름이 아니며, 우리만 홀로 궁력(弓力)이 해이해지고 적은 활의 힘이 약해지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빗물에 강이 막히고 적은 막히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산천이 험하고 적은 험하지 않겠습니까? 

 손무(孫武)는 말하기를, ‘승리는 빠르게 얻으라.’ 하였습니다. 대체로 보아 옛 선인들이 용병(用兵)을 할 때 제일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신속하게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신속한 승리처럼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수들이 지체하고 진격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조실록, 재위 13년 6월 14일)


 세조는 상소를 보고 만족해하며 하급 무사인 갑사 유자광을 불러 알현하고 왕을 지키는 경호 군사인 겸사복(兼司僕)으로 임명하였다. 세조가 북방의 반란에 대해 의견을 낸 비천한 자에게까지 칭찬하고 승진을 시키자, 여러 사람이 반란군을 토벌할 계책을 담은 상소를 올렸다. 사관은 유자광 뒤에 비슷한 상소가 많아졌다고 지적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유자광이 상소를 올린 뒤에는 어찌 북방의 난에 대해 말하는 상소가 이리 많은가.’ 하였다. 이는 상소를 올려 승진을 구하는 것을 비난한 말이었다.” (세조실록, 재위 13년 7월 17일)

 

 이러한 상소 중에 실제 반란군과의 전투에 써먹은 계책이 있었다. 수륙양면책을 제안한  성균관 사성(司成) 민정의 상소였다.  

 "신이 지난해에 함길도를 두루 지나면서 그 수륙(水陸)의 험하고 평탄한 것과 군병의 강하고 약한 것과 인심의 속되고 고상한 것을 대략 알았습니다. 만약 수군을 쓰지 않고 육지로만 진군하기를 힘쓰면, 적이 형세가 궁하면 반드시 험준한 고개에 의거하여 굳게 지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수만의 대군이 고개를 오르려고 해도 오르지 못할 것이며 싸우려 해도 싸우지 못할 것인데,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수만의 대군들이 어찌 추위를 이기겠습니까? 경상도와 강원도의 전함을 모아서 정박시키고, 만약 부족하면 바닷가 지역의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전함을 만들게 하고, 또 가까운 포구의 배 타는 데 익숙하고 날쌘 병졸을 뽑아서 시기와 형세를 살펴 수륙(水陸) 양면에서 일제히 진군하면, 적들은 반드시 패퇴하게 될 것입니다.”


 성균관 교수 민정이 올린 상소에 담긴 계책은 실지로 채택되어 반란군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토벌군은 민정이 상소에서 제시한 수륙양면작전을 함길도 만령 전투에서 활용하였다. 반란군은 천혜의 요새에서 방어를 하니 관군의 공격과 접근이 어려웠다. 좌대장 회령 부사 어유소는 정예군을 차출해 작은 배에 태워 봉우리 뒤쪽에 접근하여 벼랑을 따라 올라 적의 배후를 쳤다. 이에 놀란 적군은 당황하였고 수륙 양방향 협공으로 토벌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토벌군이 반란군의 주력부대를 무너뜨리자, 이시애는 길주와 경성(鏡城)을 거쳐 국경 넘어 여진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부하들의 배반으로 관군에게 넘겨졌고,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다. 이로써 이시애의 난은 3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중인지지(衆人之智) 하면 가이측천(可以測天)이라는 말이 있다.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면 하늘의 뜻도 예측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집단지성(集團知性, collective intelligence)과 통하는 말이다. 반란군 진압 후 세조에게 인터뷰를 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듯하다

 “한 사람의 생각보다는 열사람의 지혜가 나은 법이오. 집단 지성을 활용하여 무인도 아닌 성균관 교수의 계책을 채택하여 역도들을 토벌하였소.”





 (그림출처: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

 * 수륙양면 전을 펼친 만령 전투를 묘사한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은 고려에서 조선까지 함경도 지역에서 무공을 세운 일화를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설명해 놓은 그림첩이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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