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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Feb 17. 2023

조선의 신숙주 vs 당나라의 위징

왕의 명을 따르기만 힘썼고 악한 일을 만류하지 않았다

 신숙주는 전라도 나주에서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고려왕조가 망할 때 불사이군을 주장하며 두문동에 은거한 신덕린이고, 조부는 태종과 동방급제한 신포시이다. 신숙주는 책 읽기를 좋아하여 과거 급제 후 숙직을 도맡아 하며 집현전에 소장된 책을 읽었다.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 잠들었을 때 세종이 발견하고 자신의 옷을 덮어 줬다는 유명한 이야기로 뭇 선비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를 위해 당시 요동으로 유배를 와 있던 명나라의 학자인 황찬(黃瓚)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도록 신숙주에 명하였다.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와 성균관 주부 성삼문을 요동에 보내서 운서(韻書)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 (세종실록, 재위 27년 1월 7일))


 신숙주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이 되자 세조의 오른팔이 되어 보좌하였다. 세조는 신숙주를 나의 위징이라고 하며 사관에게 명하여 역사의 기록에 남게 하였다.

 “임금이 ‘신숙주는 곧 나의 위징(魏徵)이다.’ 하고는, 사관을 돌아보고 명하여 이 말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세조실록, 재위 3년 3월 15일)

 위징은 당나라 태종 때의 뛰어난 신하였다.


세조는 이후로도 여러 번 신숙주를 자신의 위징이라고 칭했다.

“임금이 모인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에게 있어 신숙주는 당나라 태종에게 위징이 있는 것과 같은데, 경들은 어떻게 여기는가?' 하자 신하들은 모두 동의했다.” (세조실록, 재위 5년 8월 26일)

 “임금이 신숙주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 이르기를,  ‘옛날의 임금과 신하로서는 당나라 태종이 위징에 대한 관계와 같은 것이 없었다. 경은 나의 위징이다.’ 하였다." (세조실록, 재위 9년 10월 11일)


 임금과는 달리 당대 선비들의 평가는 달랐다. 사관은 신숙주의 죽음을 두고 졸기(卒記)를 쓰면서 신숙주가 위징처럼 기개를 가지고 임금에게 간(諫) 하지 못한 것이 단점이라고 기록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신숙주는 일찍이 중한 명망이 있어, 세종이 문종에게 말하기를, ‘신숙주는 국사(國事)를 부탁할 만한 자이다.’라고 하였고,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경은 나의 위징(魏徵)이다.’라고 하였고, 매양 큰 일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보았다. 그러나 세조를 섬김에 명을 좇아 따르기에만 힘썼고, 예종 때 형정(刑政)이 공정함을 잃었는데 악한 일을 못하게 만류한 바가 없었다. 이것이 그의 부족한 점이다.” (성종실록, 재위 6년 6월 21일)


 당 태종이 위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 묻자, 위징은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뜨게 해 주지만 반대로 전복시킬 수도 있다’라는 비유로 준엄하게 답하였다. 위징의 간언은 타협이 없었으며 때로는 태종을 정면으로 비난하여, 태종은 이에 대해 화를 내는 일도 간혹 있었으나 200여 차례에 걸친 그의 간언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사관이 보기에 신숙주는 위징과 달리, 임금의 명령을 좇아 따르기만 힘쓰고, 임금의 지시가 잘못된 것일 경우에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법은 산 사람을 심판하고, 역사는 죽은 사람을 평가한다는 말이 있다. 역사는 단종복위 운동을 일으킨 성삼문이 제일 먼저 처치해야 할 자로 신숙주를 지목했음을 밝혔다.  

 “김질은 성삼문이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하며 아뢰기를,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 하였습니다.'"(세조실록, 재위 2년 6월 2일)  

 역사는 또한 신숙주를 평가하면서 선비가 가져야 할 기개가 부족했음을 아쉬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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