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총애하는 여인을 잘못 높이려다 처형당할 뻔한 신하
1903년 대한제국 광무 7년, 고종 실록의 기사이다.
“순비(淳妃) 엄씨(嚴氏)를 황귀비(皇貴妃)에 책봉하였다.” (고종실록, 재위 40년 12월 25일)
영친왕의 어머니 황귀비는 어린 나이에 궁녀로 입궐해서 중궁전의 상궁으로 있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분노하여 엄상궁을 궐 밖으로 내쳤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죽자 고종은 엄상궁을 다시 궁으로 불렀다. 엄상궁은 영친왕을 낳은 후 내명부 종1품 귀인, 정1품 순빈(淳嬪)에 이어 순비(淳妃)로 봉해졌다. 고종황제는 황후 자리를 비워둔 채 엄씨를 황후로 들이고 싶었으나 반대에 부딪혔다. 엄씨가 미천한 신분이었고, 숙종이 세워놓은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법 때문이었다. 결국 후궁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황귀비의 직책을 받아 황후가 없는 상황에서 순헌황귀비 엄씨가 실질적으로는 황후로 대우받는 걸로 이 문제는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용익(李容翊)을 처형하라는 대신들의 탄핵이 제기되었다. 고종 실록의 기록이다.
“의정(議政, 총리대신) 윤용선과 군부 대신 임시 서리 이근택 등이 아뢰기를, 내장원 경(內藏院卿) 이용익은 신하로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지엄한 자리에 계신 분을 핍박하였으며, 또 당치 않은 데 비교하면서 거리낌 없이 흉악하게 굴었습니다. 아! 저 이용익의 흉악한 심보와 고약한 말은 천고에 보지 못한 큰 변괴입니다. 반역의 진상이 뚜렷이 드러났으니 잠시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곧바로 파면시키고 법부(法部)로 하여금 법률에 따라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고 규율을 엄숙하게 하여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풀어 주소서." (고종실록, 재위 39년 11월 27일)
고종이 총애하는 엄순비가 황후는 안 되니 어떤 호칭으로 부르는 지위에 두어야 하느냐를 두고 조정의 논의가 있을 때,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내장원의 수장인 이용익이 실수를 하였다. 이용익이 ‘옛적에 양귀비가 있었으니, 엄귀비라 하면 어떨까요?’라고 의견을 내었다. 나라를 망하게 한 악녀를 엄순비에 비교한 사실을 두고 조정의 대신들은 황실과 엄순비를 모독한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용익은 함경도에서 태어나 보부상과 북청물장수를 하여 걸음이 빨랐다. 빠른 걸음을 이용하여 임오군란 때 장호원에 피신을 한 명성황후와 고종의 연락책을 담당하는 공을 세워 관직에 올랐다. 변방출신으로 무식한 이용익의 거듭된 출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조정대신들이 절호의 기회를 잡아 탄핵한 일이었다.
고종이 이용익의 처단을 미루자 조정 대신들은 거듭 상소를 올렸다. 윤용선 등이 먼저 아뢰었다.
“신들은 어제 이용익을 성토하는 일로 목욕재계를 한 다음 연명 상소를 올리고 삼가 처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비답을 받고 보니 윤허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한 번 두 번 전달되면서 말이 과장되었을 것이라는 말씀까지 하셨으므로 신들은 절반도 채 읽기 전에 더없는 억울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 저 이용익으로 말하면 누구보다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은 만큼 마땅히 보답하려는 마음이 남보다 갑절 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하로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반역의 진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단지 황귀비를 핍박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폐하에게 저촉되는 일입니다. 죄가 극히 엄중하고 성토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만큼 마땅히 자리에서 물러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데, 대궐 안에 들어가 서성거리며 나오지 않으니 그의 의도가 더욱 흉측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와서 처단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횡포해져서 제지하기 어려운 날이 있을 것입니다." (고종실록, 재위 39년 11월 29일)
이어서 중추원 의장 조병세 등이 윤용선을 동조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용익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용납하기 어려운 자입니다. 대체로 임금을 거스르는 지극히 흉악하고 고약한 말을 하고도 나라의 법망을 벗어난 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처단해야 한다고 하는 자인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는데도 폐하만이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다면 폐하께서 온 나라 사람들을 믿지 않고 일개 이용익만을 치우치게 사랑하는 것으로써 공명정대한 도리가 아닐 것 같습니다. 나라의 법이 한번 무너지면 역적이 꼬리를 물고 나타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종실록, 재위 39년 11월 29일)
그래도 고종이 허락하지 않으니. 윤용선과 여러 대신들은 대궐문 밖에 나가 엎드려 황제를 압박했다. 고종은 대신들에게 성토를 그만하도록 명하였다.
“경들처럼 노성(老成)한 처지에서 이것이 무슨 체모인가? 정승들의 한마디 말, 한 가지 행동은 모든 사람이 쳐다보고 있다. 밤도 깊었고 그 모습이 매우 좋지 못하니 즉시 집으로 돌아가라." (고종실록, 재위 39년 11월 29일)
고종은 대신들의 거듭된 주청으로 이용익에게 파직을 명하고, 향리로 내쫓았다. 하지만 고종은 이용익을 곧 다시 도성에 불러들여 내장원 경으로 재임명하고, 외국과 쌀 무역에 대한 사무를 맡기고, 자력으로 철도를 부설하려고 서북 철도국을 설치하여 총재에 겸임하도록 임명하였다. 고종 41년 1월에는 이용익을 국가재정의 총책임자인 탁지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탁지부 대신 이용익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열강의 침략에 나라가 휘말릴 것을 우려하여 정부로 하여금 조선의 엄정중립을 선언하도록 하였다. 이때 이용익이 주도한 선언이 ‘대한제국 중립선언'이다. 그 결과 전쟁 중 일본으로 압송되어 온갖 회유를 받았으나 이용익은 모두 거절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할 때, 부국강병을 위한 인재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입하여 돌아왔다. 귀국 후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힘썼다.
이용익은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다가 일본 군인들에게 연금당하기도 하였다. 을사늑약의 체결 이후 국권이 박탈되자 이용익은 고종의 지시를 받고 육군부장(陸軍副長)이라는 직명으로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프랑스로 향하던 중 중국 산동성 연대항(煙臺港)에서 일본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 뒤 해외를 유랑하며 계속해서 일제의 침탈에 빠진 조국의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망하였다. 대한제국은 고종 44년 4월 28일, 이용익(李容翊)에게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용익 탄핵에 앞장서던 이근택은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한일 협정문에 찬성을 한 을사오적이 되었으며, 윤용선의 손자 윤덕영은 나라를 일본에게 팔아넘겨 귀족 작위를 받은 8명의 매국노인 경술국적이 되었다. 학문이 낮고 무식하다고 경시하고 말실수를 꼬투리 잡아 이용익을 처형하라고 주장하던 그들의 이중성이 역사의 아이러니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