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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Feb 03. 2023

연극 <레드>, 그림이 말을 걸었다

연극이 끝나고 두 연기자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1월 마지막 날, 오래된 벗들과 모임에서 예술의 전당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레드> 이야기가 나왔다. 추상 표현주의 화가 로스코가 나오는 연극이라고 했다. 로스코는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다. 우리 집 침실에 로스코의 ‘노랑, 주황, 빨강’이라는 작품이 걸려있지 않은가. 좋은 정보를 준 친구에게 감사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내에게 말해 로스코 연극을 보기로 했다. 서로 시간을 맞춰보니 다음 날이 적당했다. 이미 매진이 되지 않았을까 우려하며 곧바로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니 마침 몇 자리가 남아 있었다. 좌석의 위치도 나쁘지 않아 우린 바로 예매하였다. 금상첨화는 연극 상연 전날이라 타임세일도 해주었다.

  

 다음날 오후, 아내와 나는 시간 여유를 가지고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10여 년 전 방배동에 살 때는 예술의 전당이 우리 부부의 주된 산책 코스였다. 음악에 맞추어 물줄기 춤사위를 보여주는 분수 쇼는 시원한 공기와 함께 낭만적인 밤을 가져다주었다. 이날은 아쉽게도 분수 쇼가 없었다. 아마 을 얼어붙게 하는 추운 날씨 때문이리라.


 금강산도 식후경! 우선 식사를 해야 했다. 예술의 전당 주변은 맛집이 많다. 우리는 예전에 자주 들르던 백년옥을 찜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임에도 대기줄에서 기다리다 주문부터 했다. 옛날 수제비와 옛날 칼국수를 시켜 나누어 먹었다. 중학생일 때 칼국수를 무척 좋아했다. 밥을 주면 반은 남겼으나, 칼국수를 해주면 대야 같은 큰 그릇에 담아주어도 다 먹을 수 있었다. 당시 국수나 칼국수를 많이 먹은 덕에 1년에 20 센티씩 키가 훌쩍 컸다.

 

 연극  <레드>는 미술의 사조를 논하고, 인생을 이야기했다. 거장의 반열에 오른 화가 로스코 (정보석 역)와 젊은 화가 켄 (강승호 역)은 세대를 대표하며 예술과 인생을 치열하고 뜨겁게 논쟁을 벌였다. 로스코는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깊은 바닷속 잠수정 속 같은 작업실에서 견고한 자의식으로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성을 쌓았다. 로스코는 새로운 문화사조인 팝 아트를 경멸했다. 로스코의 조수로 나오는 켄은 고용주이자 대선배인 로스코의 편협하고 닫힌 사상을 거침없이 지적했다. 켄은 예술의 상업화를 비판하는 로스코가 백만장자들이 드나드는 씨그램 빌딩의 고급 레스토랑 벽화 작업에 응한 것은 모순이라고 비난하였다.


 두 인물의 치열한 토론과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주는 2인극인 만큼, 배우들의 밀고 당기는 연기 호흡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랜만에 몰입하며 본 연극이었다. 러닝 타임 100분가량, 한 대사 한 대사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예술과 삶에 대한 두 사람의 농도 짙은 대화의 의미를 생각하며 연극에 빠져들었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휘몰아치듯 대립하는 두 사람의 말과 몸짓을 숨죽여 보았다. 국악으로 치면 진양조로 시작하여 중모리나 중중모리로 이어지고 자진모리와 휘모리로 달아나며 무대를 채워나갔다. 연극이 막판에 이를 즈음에는 실제로 로스코의 그림이 말을 걸어왔다.


 드디어 연극이 끝났다. 정보석과 강승호의 대단한 연기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연극의 무대장치와 소품,  물감과 붓이 담긴 양동이와 거대한 캔버스들, 게다가 극의 전개에 따라 적절히 변화되는 조명은 연극 자체와 연극 속에 나오는 붉은색 <레드>의 깊이를 더했다.


 <레드>는 로스코의 예술에 대한 고뇌를 통해 인생을 생각해보게 하는 연극이었다. 극장을 나오면서 아내가 말했다.

 “잘 나가는 연기자나 배우들도 로스코의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배우나 연기자는 물론 잘 나가는 영화감독, 연주자와 지휘자, 은퇴를 앞둔 뛰어난 스포츠 선수들도 비슷하게 느끼는 감정일 거야.”


 극장을 나오면서 정보석과 나란히 있는 유동근의 사진을 보며 궁금해졌다.  

 '유동근이 연기하는 로스코는 어떨까. 정보석과 유동근 중에 누가 더 로스코에 가까울까.'

 




 (사진 출처: 연극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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