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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그레이트폴(Great Fall)에서

by 두류산

바쁜 하루의 끝자락,

작은 여유를 찾아

아내와 나는 길을 나선다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온전히 들어주는 시간 속에

사랑은 꽃 피고, 존중은 뿌리를 내리며,

하늘은 물들고, 길은 익어간다


결혼 25년,

우리는 늘

함께 걷는 길을 만들었다

방배동에 살 땐,

근처 교회 주변 골목길을 돌고

서점에 가서 신간 책을 보거나,

예술의 전당에서 문화의 향기를 즐겼다

과천으로 와서는

아파트를 적시는

개천 물소리를 따라 걷고

호수와 미술관을 잇는 길 위에

사계절을 새겨 넣었다.


발걸음은 점점 멀어져

남산 팔각정의 바람과

북한산 둘레 길의 숲 향기,

창덕궁 비원에 뜬 달빛 아래

우리의 그림자를 남겼다.

벚꽃 물결 따라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제주의 올레길, 담양의 대나무 숲길,

꽃길과 청보리 밭 너머로 이어진

순천의 선암사와 고창 선운사,

천천히 걷는 증도와 청산도의 바닷길,

윤선도의 시심을 따라간 보길도,

강릉의 바닷바람, 주왕산의 아름다움,

문경새재의 능선, 질마재의 고요까지,

그 모든 길은 우리 마음속에

지도처럼 흔적이 되어 스며있다


지금은 미국 땅,

버지니아 포토맥 강을 따라

강변길과 숲길을 걷는다

이름처럼 ‘그레이트’한 폭포는 아니지만

사슴이 길을 비켜주고

반딧불이 숲 속을 수놓는 이 길은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는 한 편의 시

강물은 익숙한 노래처럼 흐르고

나무의 숨결은 계절의 비밀을 속삭인다


오늘도, 우리는

함께 걷는 이 길 위에서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사랑을 매만지고

존중을 피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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