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는 하루아침에 병조판서 자리에서 물러나자, 눈에 핏발이 섰다
1468년 세조 14년 7월.
유구국(琉球國, 지금의 오키나와에 있었던 왕국) 사신이 조선에 왔다가, 귀국하기 위해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올렸다. 세조는 병조참지 유자광을 불러 사신들의 귀국길 호송을 명했다.
유자광은 사신이 타고 온 배가 있는 제포(薺浦, 지금의 진해)로 떠나면서 세조를 알현하였다. 세조는 유자광에게 은밀한 지시를 하였다.
"제포에 가서 왜선의 형태와 조작하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라.”
유자광은 지시를 받은 후, 임금에게 청을 드렸다.
"원컨대 돌아오는 길에 남원에 들러 연로한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조는 굳이 자신에게 말하지 않더라도 오는 길에 남원에 들를 수 있을 텐데 허락을 얻는 유자광의 담백한 태도가 좋았다.
세조는 유자광이 물러간 후 전라관찰사에 글을 내려 유자광이 남원에 도착하면 부모를 위해 잔치를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그해 여름 세조의 병은 갑자기 위중해졌다. 피부병도 심해지고 꿈자리도 뒤숭숭하여 잠을 자주 깨어, 몸의 원기도 급격히 쇠약해졌다.
세조는 자신이 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였다.
"세자에게 왕위를 잇도록 하라.”
세조는 임금 자리를 물러주고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가, 양위한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유자광은 유구국 사신의 귀국길 호송관 임무를 마치고 남원에 머무르다 이 소식을 들었다. 세조의 죽음은 유자광에게 비통한 충격을 가져왔다.
"조정에서 유일하게 나를 인정해주시는 성상(聖上)이 승하하시다니......”
유자광은 부모가 돌아간 것처럼 몸부림치며 통곡하였다.
국왕이 승하하고 젊은 임금 예종이 왕위를 이었다. 세조 때 최고의 공신이었던 한명회와 훈구대신들은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새 임금의 즉위식을 마치고 나오면서 한명회가 신숙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왕께서는 나를 장자방으로, 공을 위징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아끼셨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다니.”
장자방은 여러 가지 책략으로 유방을 도와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운 건국공신이었다. 위징은 당 태종 때의 뛰어난 신하였다. 태종이 위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 묻자, 위징은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뜨게 해 주지만 반대로 전복시킬 수도 있다’라는 비유로 대답했다. 위징의 간언은 준엄했으며 때로는 태종을 정면으로 비난하여, 태종은 이에 대해 화를 내는 일도 간혹 있었으나 200여 차례에 걸친 그의 간언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훈구대신 한계희가 한명회와 신숙주를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면서 급부상한 신(新) 공신들과 무장 세력들, 이들이 경망되게 불충한 일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불안합니다.”
한명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순은 늙었고, 귀성군은 유순한 성격이라 문제를 일으킬 위인들이 아니에요. 하지만, 남이가 걱정이오.”
여러 구(舊) 공신들이 한명회의 말에 동조하였다.
"남이는 병권을 책임지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성질이 오만하고 경솔한 남이가 병조의 장관이니, 화약이 불 옆에 놓인 격입니다.”
한명회는 구공신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야 곤란하지요.”
세조는 일찍이 한명회를 ‘나의 장자방’이라고 하였고, 신숙주를 ‘나의 위징’이라고 말하며 사관을 돌아보고 명하여 이 말을 기록하여 역사에 남기도록 하였다. 사관은 세조의 말과 함께, 신숙주가 위징처럼 기개를 가지고 임금에게 간(諫)하지 못한 것이 단점이라고 기록하며 아쉬워했다. 신숙주는 위징과 달리, 임금의 명령을 좇아 따르기만 힘쓰고, 임금의 지시가 잘못된 것일 경우에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예종이 즉위한 다음날, 한계희와 구공신들은 임금에게 나아가 남이를 배척하였다.
"남이의 사람됨이 병권을 맡기기에는 마땅치 못합니다.”
"군사를 지휘하는 병조의 장관으로 남이는 성질이 경망하여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예종은 남이의 경솔함을 보아온 터라, 이들의 청을 무겁게 여겼다. 새 임금은 곧바로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좌천시켰다. 겸사복장은 왕의 신변보호를 맡은 경호 군사를 통솔하던 종 2품의 무관 벼슬이었다.
남이는 하루아침에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눈에 핏발이 섰다.
“구공신들은 결국 나를 완전히 없애려 하는 것이다.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
강순은 남이의 갑작스러운 좌천 소식을 듣고 위로하기 위해 남이의 집을 방문했다. 강순에게 남이는 이시애의 난이나 여진 정벌에 목숨을 걸고 전선을 함께 누빈 전우이자 동지였다. 남이는 강순을 반갑게 맞아 사랑방으로 안내하고 술상을 내오게 했다.
남이는 강순에게 술을 권하며 구공신들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대행 왕이 돌아가시니 구공신들이 우리 신 공신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입니다”
대행 왕은 임금이 죽은 뒤 시호가 정해지기 전의 칭호이다.
강순은 남이의 좌천을 목격하고 동병상련(同病相憐)으로 곧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으로 생각하며 불안했다. 강순은 남이가 숨기지 않고 생각을 밝히니 맞장구를 쳤다. 강순은 남이가 명문가 출신에 벼슬도 낮지 않아 예를 갖추었으나 젊은 시절부터 전장을 함께 누볐기에 말을 편하게 하였다.
"시절이 의심스럽고 인심은 위태롭네. 구공신들이 우리를 해하려 하는 조짐이 보여. 그들이 어린 임금을 끼고 일을 저지른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강순은 무인으로 함길도 등 주로 변방에서 근무하다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일등공신에 책봉된 뒤 우의정에 발탁되어 조정에 들어왔다. 군의 총사령관격인 오위도총부 도총관도 겸하여 맡고 있으나 구공신들의 견제에 늘 조심스러웠다.
남이는 강순이 자신의 말에 동조하자 노골적으로 구공신들을 비난했다.
"한명회와 김국광 등은 이미 마각을 드러냈어요. 대행 왕이 승하하시자마자 그다음 날 병권을 가진 나를 쫓아냈으니, 이것은 뭔가 일을 벌일 사전조치가 틀림없습니다.”
강순은 남이의 말에 등골이 서늘했다. 강순은 남이가 채운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말했다.
"우리 신 공신들은 선왕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사직을 지킬 의무가 있네. 나는 이미 늙었고 남 판서는 젊고 굳세니, 그들이 무슨 일을 일으키든 남 판서가 막아야 하네. 그렇지 못하면 신 공신들은 다 죽은 목숨이야.”
남이는 술이 거나하게 취한 강순을 가마에 태워 배웅하고, 마당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다.
유자광이 한성으로 복귀하니 국상(國喪)으로 대궐의 분위기가 침통하였다. 유자광은 입궐하여 예종에게 선왕이 은밀히 지시한 제포에서 본 왜선의 모양과 조작하는 방법에 대해 보고하였다.
"신이 대행 왕의 밀지를 받고 왜인을 제포에 호송하여, 그들이 타고 갈 왜선과 아울러 삼포에 정박해 있는 왜선들을 살펴보았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그 모양을 좇아 만들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유자광은 이어서 조선에 정착한 왜인의 수가 너무 많아, 장차 화가 될 수 있음을 아뢰었다.
"왜인에게 개항한 항구에 사는 자의 수가 1만 명을 헤아리기에 이르니, 만약 대비하지 않으면 후환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예종은 유자광의 노고를 치하하고, 예조에 명하여 삼포에 사는 왜인의 수를 보고하게 하였다.
삼포는 세종 때에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청원을 허락하여 부산포, 제포, 염포(鹽浦, 지금의 울산)에 설치하여, 왜인들의 거주와 교역을 허락한 곳이었다. 유자광이 삼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숫자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은 40여 년 후 중종 5년에 왜인이 일으킨 삼포왜란(三浦倭亂)의 발발로 현실화되었다.
1468년 예종 즉위년 9월, 밤하늘에 돌연히 혜성이 나타나 한양의 백성들이 모이면 수군거렸다.
"새 임금이 즉위하자마자 하늘에서 징조를 보이니, 무슨 난이라도 있으려나?”
조정에서도 이것을 심각하게 여겨 도승지 권감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혜성이 우리나라를 지나고 있으니 청컨대 재앙이 오지 않도록 하늘의 땅과 신령에게 빌도록 하소서.”
젊은 임금은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되물었다.
"불경에 그런 술법이 있는가? 한계희에게 물어보라.”
부름을 받은 한계희가 어전에 달려와 아뢰었다
"소격전에서 별에 지내는 제사를 행하고, 동시에 내불당에서도 제사를 하게 하소서.”
임금은 한계희의 말대로, 혜성의 출현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재앙을 막기 위해 도교와 불교의 방식으로 신령에게 제사 지내는 음사(淫祀)를 행하였다.
나라에서 음사를 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김심과 김흔 형제가 스승인 김종직을 찾아와 불편한 마음을 토로하였다.
"새 임금이 즉위하시자마자 하늘과 별에 제사를 지내고, 부처에 비는 음사를 행하니 이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유교의 가르침과 명분에 심하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김종직은 제자들의 비통한 말에 한숨을 토했다.
"옛말에 ‘모르는 귀신한테 제사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어진 정사를 행하면 근본이 굳어지고 나라가 편안하여질 것인데, 어찌 사도(邪道)에 의지할 일이겠는가. 군왕이 먼저 음사와 관계되는 일을 일절 멀리해야, 비로소 나라 전체의 풍속이 바로잡혀갈 것인데.....”
사관들은 당시 혜성의 출현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실록에 의하면 혜성이 처음 나타난 것은 세조가 예종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당일인 9월 7일이었다. 다음날,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새 임금이 된 그날 밤하늘에도 다시 혜성이 나타났다. 이후 9월 26일까지 이틀 동안만 혜성이 관측되지 않고 18일간 연속해서 혜성이 나타났다. 9월 27일, 예종은 천지신명과 부처에게 제사를 지내 혜성이 재앙을 가져오지 않도록 빌었다. 이후에도 혜성은 당분간 계속해서 나타났음을 실록은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혜성의 출현이 반란이나 가뭄 등 재앙을 몰고 오는 예사롭지 않은 조짐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