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의 역모를 저지하다 (2)

간신이 난(亂)이라도 일으키면 나는 물론 너도 개죽음을 당할 것이야

by 두류산

2장


유자광은 궁궐 내에 설치되어 있는 병조의 출장소인 내병조(內兵曹)에서 밤을 새우며 숙직을 하고 있었다. 이때 남이도 왕의 신변보호를 맡은 겸사복을 통솔하는 겸사복장으로 숙직을 하였다.

남이는 오위도총관인 강순이 숙직하고 있는 곳에 들렀다. 강순은 찾아온 남이를 반갑게 맞아 손을 잡고 은밀한 곳으로 데려갔다.

"대행 왕이 승하하시고 어린 임금이 왕위를 잇자마자 혜성이 등장하니 반드시 간신이 때를 타서 난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들부터 큰 화(禍)를 입을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남이는 가슴을 펴고 강순에게 말했다.

"우리가 세력이 약하니 먼저 선수(先手)를 쳐야 합니다.”

"내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네.”


남이는 그동안 생각했던 계획을 밝혔다.

"대감과 더불어 같은 날에 숙직을 하면, 나는 겸사복을 거느리고, 대감은 도총부 군사를 거느리고 일을 치릅시다.”

강순은 남이의 양손을 굳게 맞잡고, 계획에 힘을 보탰다.

"내 고향 보령의 군사 가운데 당번으로 서울에 있는 자가 백 명 정도가 되니, 만약 때에 임하면 그들도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네.”


남이는 강순이 숙직하고 있는 곳을 떠나 궁궐의 담을 따라 걷다가, 유자광이 숙직하고 있는 내병조로 향했다. 남이와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과 변방의 야인들을 함께 토벌하고 전쟁터를 누비며 고락(苦樂)을 함께하여 특별한 정이 들었다. 더구나 할아버지 때부터 친족 간이라는 것을 알고 남이는 유자광을 더욱 가깝게 여겼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이니, 구공신들은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다. 내 사람으로 만들면 큰 힘이 될 것이야.’

남이는 내병조를 들러, 활과 환도(環刀)를 풀어서 내려놓으며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건장하시던 대행 왕께서 돌아가시다니 믿기지가 않아.”


유자광은 남이의 말에 선왕이 생각나서 울컥하였다. 얼마나 자신을 아껴주던 군왕이었던가. 천한 출신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의견을 올리거나,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면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듯 대견해하셨다.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일개 갑사에 불과한 자신을 겸사복으로, 이어서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고 병조정랑에 임명하시고, 문과 장원으로 합격시켜 정 3품 병조참지까지 전례에 없는 출세를 시켜주신 분이었다.

‘다른 사람이 다 나를 천출이라 배척할 때, 오로지 대행 왕께서 나를 거두셨다.’

유자광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1년 전만 해도 역적 이시애를 잡겠다고 군사를 이끌고 직접 북방으로 가시려고까지 하셨는데.....”

"그분은 우리를 아들같이 대하셨어.”

유자광은 남이의 말에 선왕의 죽음이 새삼 아프게 다가왔다. 선왕이 살아있을 때는 귀성군 이준과 남이가 오른 병조판서에, 자신도 될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 자신의 재주를 아끼고 울타리가 되어준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유자광은 천한 태생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조정의 신하들에게 포위된 느낌이었다.


유자광은 절로 한 숨이 새어 나왔다. 남이도 덩달아 크게 한숨을 쉬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라에 큰 상사(喪事)를 당하니, 인심이 위태롭고 시절이 의심스러워. 이런 때, 간신이 난(亂)이라도 일으키면 나는 물론 너도 개죽음을 당할 것이야. 마땅히 너는 나와 함께 충성을 다해 선왕의 은혜를 갚아야 할 것이야.”

유자광은 뜻밖의 말에 놀라 물었다.

"어떤 간사한 사람이 있어, 난(亂)을 일으킨단 말입니까?”

남이는 유자광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조정에 간사한 사람으로 가득 찬 것이 보이지 않느냐? 구공신들을 보아라! 한명회는 욕심 많고 추한 구공신의 우두머리이고, 노사신은 매우 어리석은 자이다. 김국광은 정사를 전횡하여 재물을 탐하니 이 같은 무리는 죽이는 것이 옳다. 한명회와 친한 한계희와 김국광, 노사신 등이 주상께 나에 대해 없는 말을 꾸미어, 내가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강등되었다.”


유자광은 할 말을 잃고 남이를 보는 데, 순찰을 나갔던 병조의 관원이 내병조에 들어서며 두 사람을 보고 인사를 하였다. 남이는 하던 말을 멈추고 활과 환도를 챙겨 내병조를 떠났다.

유자광은 남이를 배웅하며, 남이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강순은 거사(擧事)의 큰 그림이 그려지자 종친 중에 누구를 국왕으로 내세워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여러 종친들 중에 무인으로 가까운 사이인 좌상대장 보성군 이합이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성군은 결단력도 있고 욕심도 있으니, 뜻이 통할 것이야”

보성군은 세종대왕의 형님인 효령대군의 아들이고 세조와 사촌 형제지간으로 강순과 남이 등 무인들과 잘 지냈다. 셋째 아들인 춘양정은 종친이면서 대과에 급제하여 조정의 신망이 높았다. 또한 보성군의 둘째 아들 율원정은 이시애 난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에 책봉되었다. 특히 넷째 아들 평성정은 왕실 호위군대인 내금위장으로 거사를 할 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강순은 바로 가마를 대령케 하여 보성군의 집을 찾았다.

보성군은 강순을 반갑게 맞아 방으로 안내하고, 술상을 내왔다. 보성군은 강순과 함께 도총부에 근무했으므로, 관청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사사로이 집으로 찾아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감은 나이를 전혀 먹지 않는 것 같습니다. 팔순을 바라보시는 연세에 검은 수염이 어찌 이토록 무성하십니까?”

강순은 보성군의 칭찬에 너털웃음을 웃었다. 보성군이 강순에게 술을 권하자 강순은 술을 단숨에 비우고, 자기(磁器)로 만든 술잔을 칭찬하였다.

"백자(白磁) 술잔에 노니는 학이 술맛을 더합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강순이 보성군을 살피며 넌지시 말했다.

"나라꼴이 어떻게 이 모양인지......”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대행 왕 앞에서는 숨소리를 죽이던 구공신들이 어린 왕을 끼고 마음대로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니 나라 걱정에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보성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순이 비운 잔에 술을 채웠다. 강순은 보성군이 시국(時局)에 대해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자 조금 더 노골적인 말을 꺼내었다.

"한명회와 구공신들은 어린 노산군의 임금 시절에 김종서와 황보인과 다를 바가 없어요.”

강순이 세조의 계유정난을 은근히 암시하는 말에 보성군은 맞장구를 쳤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함길도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우리가 아니었으면 사직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공신들은 권세만 탐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합니다.”


강순은 보성군의 호응하는 말에 만족하며 아들 춘양정을 불러달라고 했다. 보성군의 부름을 받은 춘양정이 사랑방에 건너와 강순에게 예를 다하여 인사하였다. 강순은 춘양정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춘양정은 종친이면서 과거에도 급제했으니 나라에 큰 복입니다.”

보성군은 강순이 백자로 된 술잔을 칭찬한 것이 생각나 춘양정에게 말했다.

"안채에 쓰지 않고 보관해온 이와 똑같은 술잔이 있을 것이다. 선물로 드리게 잘 싸서 가져오너라.”

강순이 손사래를 치며 극구 사양하자 보성군은 춘양정에게 말했다.

"어른들끼리 긴한 이야기가 있으니, 너는 그만 물러가 있어라.”


강순은 춘양정이 방에서 나가자 보성군을 돌아보며 말했다.

"춘양정의 관상을 보니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보성군은 강순의 마음을 읽으려고 애썼다. 강순은 보성군에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술잔 하고 그새 정이 들었으니 허락하신다면 이놈을 가져가겠습니다.”

보성군이 새것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강순은 웃으며 거절하고, 먹던 술잔을 도포 소매자락에 넣고 집을 떠났다.


보성군은 강순이 돌아가고 나서 생각에 잠겼다.

‘강순이 속 시원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뭔가 있다.’

보성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친이 이루지 못한 일이 나의 대에 이루어지려나?’

다음날 보성군은 춘양정을 시켜 백자로 만든 술잔 한 벌을 강순의 집에 보냈다.

"강 도총관에게 극진히 인사를 하고 드려라.”


며칠 후 강순은 궁궐에 입직하여 겸사복장실에서 숙직을 서고 있는 남이를 찾았다. 강순은 남이가 불빛 아래 《고려사》를 읽는 것을 보고 무슨 대목을 보고 있는지 물었다. 남이는 강순에게 책을 건네며 읽고 있는 부분을 가리켰다.

"강조(康兆)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세운 장면을 읽고 있습니다.”

강순이 《고려사》를 받아 들면서 말했다.

"당시에는 강조의 난을 잘못이라고 비난했으나 후세에서는 잘했다고 칭송하니, 지금의 형세와 다를 바 없다.”


남이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계책이 정해졌으니, 장차 우리가 임금으로 삼을 이는 누구입니까? 세종대왕의 손자이신 영순군은 어떻습니까?”

강순은 고개를 흔들었다.

"영순군은 자손이 미약해. 얼마 전에 보성군과 더불어 요즘 돌아가는 형세를 이야기했는데 보성군도 탄식하며 나의 말에 일일이 동조하였네. 이후 아들 춘양정을 내 집에 보내기도 하였으니, 마음에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우리가 임금으로 내세울 이는......”

겸사복장실에 누군가 들어오는 듯 인기척이 나자 강순은 말을 멈추었다. 강순은 남이에게 《고려사》를 돌려주며 소리를 죽여 말했다.

"우리가 간신들의 난을 막아 공을 이룬 후에, 자리에 욕심내지 않고 물러서 있으면 누가 우리를 옳지 못하다고 하겠는가?”


강조(康兆)는 고려 제7대 왕인 목종(穆宗)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한 정변을 일으켰다. 거란의 성종은 정변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침입했다. 강조는 총사령관이 되어 맞서 싸워, 처음에는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거란 군에 포로가 된 강조에게 거란 성종이 자기의 신하가 되어달라고 권유했다. 강조는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는가.”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부장(副將) 이현운이 거란 성종의 회유에 굴복하자, 고려인의 긍지를 잃지 말라고 몹시 나무라고는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강순은 강조의 정변을 나라를 위한 충성이라 보았고, 거란의 왕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강조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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