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공신들이 반역을 하기 전에 먼저 거사를 일으켜야 할 것이야
1468년 예종 즉위년 10월.
병조를 발칵 뒤집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구공신인 좌찬성 김국광이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병권을 맡았는데 김국광을 희롱하고 비방하는 방(榜)이 거리에 붙은 것이었다. 김국광이 뇌물을 받아 챙기며 병조 인사를 마음대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예종은 보고를 받은 후, 승정원에 명하여 김국광의 병조판서 겸직을 즉각 내려놓게 하였다.
강순은 김국광이 문제가 되자 병조판서에서 곧바로 물러나게 하는 것을 목격하고 임금에 대한 생각을 달리했다. 어린 임금이 훈구대신들에게 우려했던 만큼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주상의 어질고 밝으심이 이 정도라면 구공신들도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남이는 강순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줄 알아채지 못하고 구체적인 거사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 의논하러 강순을 찾았다.
강순은 조급함을 보이는 남이를 진정시켰다.
"성상께서 김국광을 내치는 것도 그렇고, 여러 재상과 함께 산릉(山陵)의 위치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조리가 정연한 천어(天語, 임금의 말)를 들으니 참으로 명철한 임금이심을 느꼈네. 어떤 간신이 임금을 쉽게 충동질하겠는가? 우리가 위험하지 않다면, 마땅히 마음을 돌려 상감을 힘써 도와야 할 것이네.”
산릉은 제왕의 묘를 가리키는 말로, 선왕인 세조의 묘를 말했다.
남이는 강순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밤낮으로 거사계획만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에 와서 꼬리를 내리는 강순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구공신들의 한마디 말에 바로 나를 내쳤는데, 명철한 임금이라고?’
남이는 강순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혼자 생각했다.
‘어차피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누구라도 나를 멈추게 할 수 없다!’
남이는 거사를 성공하려면 사람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이는 누구를 거사에 가담시킬 것인지 여러 무장들을 떠올렸다.
‘거사를 치르는 날 병조의 군사를 얻으려면 유자광의 도움이 필요하다.’
유자광과는 전쟁터에서 함께한 동지적인 관계였다. 게다가 유자광은 무장들인 신(新) 공신들과는 긴밀한 유대가 있으나, 구공신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유자광은 어차피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갈 데가 없는 자야.’
남이는 밤중에 유자광의 집을 찾았다. 유자광은 남이가 왔다는 기별을 듣고 뛰어나와 맞았다. 남이는 한 손으로 유자광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유 참지, 우린 보통 사이가 아니야. 할아버지 때부터 인연을 맺었으니.”
유자광은 술 냄새가 풍기는 남이를 사랑채로 안내했다. 남이는 방에 앉자마자 유자광에게 물었다.
"혜성이 또다시 저녁 하늘에 나타나 꼬리가 동쪽으로 향했는데, 유 참치도 보셨는가?”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습니까?”
"지금은 혜성이 은하수 가운데에 들어 빛의 줄기가 희기 때문에 쉽게 볼 수가 없네.”
유자광은 사서(史書)를 가져와서, 혜성이 나오는 부분을 찾아서 남이와 함께 살펴보았다. 책의 해설을 보니, ‘혜성의 빛줄기가 희면, 장군이 반역하고 큰 병란이 있다.’라고 써져 있었다.
유자광은 긴장하며 읽었다.
"장군이 반역을 일으키고 병란이 있다?”
남이는 유자광이 읽은 역사책의 주석에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 말하는 대로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으로 보네.”
유자광은 눈을 크게 뜨고 남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이가 채근하는 유자광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음속에 품은 말을 꺼냈다.
"구공신들이 반역을 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거사를 일으켜야 할 것이야.”
유자광은 남이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구공신들이 반역을?”
"한명회와 구공신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우리를 먼저 쳐서 죽일 것이네.”
남이는 유자광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얼마 전에 주상이 선전관들로 하여금 재상들의 집에 분경(奔競)하는 자를 매우 엄하게 살피게 하니, 훈구대신들이 불만을 품었다고 들었네.”
분경은 분주하게 쫓아다니며 이익을 얻으려고 경쟁한다는 뜻인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관직을 얻으려고 권력자의 집에 분주하게 드나듦을 이르는 말이었다. 분경 금지는 조선 초기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분경하는 자는 장 100대, 유배 3000리에 처한다고 법을 제정하여 권세 가문에 드나들면서 사사로운 청탁을 하는 것을 봉쇄하였다.
유자광은 놀란 마음을 감추고, 남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얼마 전에 신숙주와 김질이 발각되어 경을 쳤고, 신숙주에게 줄을 댄 함길도 관찰사는 목이 달아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분경 금지를 심하게 하니, 구공신들이 불평과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남이는 유자광의 말에 목소리를 높였다.
"선왕 때에도 탐욕스러운 한명회가 황해도 관찰사 윤잠에게 표범 가죽을 뇌물로 받다가 발각된 일이 있지 않았는가? 그때 윤잠은 장(杖) 80대에 파직을 당했으나 뇌물을 받은 한명회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네. 뇌물을 받은 자가 더 나쁜 것인데, 이번에도 받은 정승은 아무런 벌도 주지 않고, 뇌물을 준 하급자만 처벌하니 이게 무슨 명철한 임금의 처사인가?”
유자광은 남이의 과격한 말에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거사를 어떻게 하시려고요?”
"주상이 계시는 수강궁(壽康宮, 훗날 창경궁이 됨)은 담이 낮고 허술하여 거사를 할 수 없고 경복궁에서 하려고 하네.”
유자광은 가슴이 철렁했다. 남이가 술김에 허황되게 내뱉는 소리가 아니라 상당히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듯하였다. 하지만 남이의 충동적인 성격을 익히 아는 터라 혼란스러웠다.
유자광은 남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같은 큰일을 우리들의 힘만으로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남이는 유자광이 선뜻 자기의 말에 동조하지는 않고 무언가를 캐묻는듯하여 술잔을 천천히 비우며 답변을 피했다.
유자광은 남이의 기색을 살피며 화제를 바꾸었다.
"주상께서 창덕궁에 오래 머물고 경복궁에 나가지 않으실 터인데 어찌 경복궁이라야 된다고 하십니까?”
남이는 유자광에게 가슴을 내밀며 대답했다
"내가 장차 주상을 경복궁으로 옮기게 할 것이야.”
"어떻게 그리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는 그리 어렵지 않네. 헌데......”
남이는 유자광이 ‘거사를 하면 무조건 따르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꼬치꼬치 캐묻고 있음을 느꼈다. 남이는 술기운이 한꺼번에 달아났다. 남이는 불편한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남이는 유자광을 내려다보고 엄중히 경고했다.
"지금 한 말은 내가 오로지 너하고만 의논했다. 네가 다른 마음을 품고 고할지라도 내가 아니라고 부인하면 너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야.”
유자광은 남이가 정색을 하며 경고하자 흠칫 놀랐다.
"물론 내가 다른 마음을 품고 고할지라도, 네가 아니라고 부정하면 마찬가지로 나도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말은 세 사람이 모여도 할 수 없는 이야기야.”
유자광은 숨을 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이는 유자광의 태도에 다소 마음이 누그러졌다.
남이는 유자광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를 따르는 사람이 많다. 대행 왕이 전국의 장정(壯丁)을 모두 군사로 삼았으므로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 백성의 원망이 지극히 깊으니 지금이 기회다.”
유자광은 남이의 불을 뿜는 듯한 눈빛에 숨이 막혀 옴을 느꼈다. 유자광은 남이가 일어서서 나가려 하므로 팔을 휘저어 남이를 붙들었다.
"집에 좋은 술이 있는 데 한잔 더 모시겠습니다.”
남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많이 마셨다. 오늘 한 이야기는 비록 처자(妻子)라 할지라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