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 당장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잡아들여라!
남이를 문 앞까지 배웅하고 난 뒤, 유자광은 몸에서 신열이 나는 것을 느꼈다. 초겨울 차가운 밤공기를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유자광은 마당에 서서 헝클어진 생각의 조각들을 모으며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유자광은 남이가 한 말들을 곱씹어 보았다.
‘구공신들이 반역을 일으킨다?’
‘임금을 경복궁으로 옮긴 후 거사를 일으킨다?’
‘백성의 원망이 깊으니 지금이 기회다?’
하나하나가 엄청난 말이었다.
‘임금을 다른 궁으로 옮긴다? 구공신들을 죽이겠다? 그러면 임금의 안위는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유자광은 허파에서 바람소리를 내며 속에 있는 말을 뱉었다.
"이건 단순히 구공신을 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상까지 겨냥한 명백한 역모다!”
유자광은 머릿속이 복잡하였다.
‘남이가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무서운 일을? 선왕(先王)에게 받은 은혜가 얼마인데.....’
유자광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주상은 구공신들의 말을 듣고 곧바로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물러나게 했다. 남이는 구공신들은 물론, 주상에게도 원한이 있는 것이야.’
유자광은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대행 왕의 은혜를 받은 자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을......’
남이가 거사를 일으킨다면, 선왕의 유일한 아들인 주상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었다.
‘이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유자광은 종을 불러 안채에 기별해 관복을 내오게 하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남이가 말하길, 내가 고변하더라도, 당사가가 부인하면 나만 죽는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두 사람뿐이었으니 나 말고 남이의 말을 증명할 다른 증인은 없다. 남이는 개국공신 명문가에 외가로는 종친이다. 남이가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고 고변하면, 누가 나의 말을 믿어줄 것인가? 선왕이 없는 지금, 주상은 과연 나의 말을 믿어줄까?’
유자광은 머리를 흔들었다.
‘주상이 나의 고변을 믿어준다고 하자. 남이를 추궁하였는데 모든 것을 부인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차가운 바람이 담에 부딪혀 회오리바람이 되어 마당에 서있는 유자광의 몸을 파고들었다.
‘주상은 부인하는 남이의 말보다 나의 고변을 믿어 줄까? 나의 말을 믿으면, 남이를 죽여야 하는데도?’
유자광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차가워진 얼굴을 양손으로 문질렀다.
아내 박씨가 관복을 손에 받쳐 들고 사랑채로 건너왔다. 박씨는 소매가 넓고 색깔이 화려한 남편의 관복을 귀하게 여겼다. 남편이 귀가하여 관복을 벗어두면 늘 정성스럽게 손질해 두었다.
"이 밤중에 어인 일로 관복을 찾으세요?”
유자광은 골똘히 생각하느라 아내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박씨는 뭔가 심각한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밤이 깊은데 어찌 관복을 찾으세요?”
유자광은 그제야 아내를 보고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오. 아이들은 잠이 들었소?”
박씨는 아이들은 일찍 잠들었다고 대답하고 관복을 입는 것을 도와주려고 했다.
유자광은 고개를 저었다.
"안 입을 수도 있소. 그러니 관복만 여기 두고 안채로 건너가시오.”
박씨는 한 밤중에 관복을 찾는 것도 괴이한 일이지만 유자광의 표정이 엄엄해서 더 이상 물어볼 수도 없었다.
향리 집안의 딸로 중인 출신인 박씨는 양반 집안 얼자 출신 남편이 지난 1년 사이에 숨 가쁘게 출세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놀랍고 기쁘기도 하였지만, 어리둥절하고 아슬아슬한 마음이었다.
사랑방을 나가는 아내에게 눈길이 따라가다가, 유자광은 눈을 감았다.
‘잘못하면 궁에 고변하러 갔다가 무고죄로 엮이어 다시는 집에 못 들어올 수도 있다. 천하게 태어나 선왕의 은혜로 일약 당상관이 되었다. 이제 지키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아내만 해도 이제 당상관 지아비를 둔 숙부인(淑夫人)이 아닌가.’
유자광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가 대행 왕에게 받은 은혜가 얼마인가. 선왕의 은혜가 없었으면 애당초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선왕과 선왕의 유일한 아들인 주상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유자광은 눈을 번쩍 떴다.
‘미천한 신분으로 두려움 없이 임금께 상소를 올리던 그때로 돌아가자.’
결심을 한 유자광이 주먹에 힘을 주었다.
‘이것은 나에게 새로운 기회도 될 수 있다!’
관복을 입고 방을 나서니 아내가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도 차가운데 왜 그러고 있소.”
"궁궐로 가실 거면, 가마를 대기시킬까요?”
"아니요, 일각이 급하니 말을 내어오게 하시오.”
박씨 부인은 유자광을 배웅하고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았지만, 한참 동안 마당에 서있었다.
유자광은 말을 몰아 궁으로 달렸다. 유자광은 궁궐에 들어가자마자 승정원으로 가서 숙직하고 있는 승지 이극증과 한계순에게 말했다.
"긴급하고 위중한 일이니, 바로 주상께 아뢰어야 하겠소.”
"무슨 일이기에 야심한 밤에 주상을 찾으시는 게요.”
“역모요! 일각이 급하오.”
승지들은 병조참지 유자광의 태도가 심상치 않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승지 이극증이 환관으로 하여금 임금께 유자광이 급히 아뢸 말이 있어 대궐에 들어왔다고 말씀드리게 하였다.
임금이 내전으로 부르자, 유자광은 임금에게 엎드려 절하고 지난번 궁궐에서 숙직을 할 때 남이가 내병조에 와서 한 이야기와 오늘 남이가 집을 찾아와서 한 이야기를 소상히 아뢰었다. 예종은 한밤중에 궁궐에 달려와 고변하는 유자광의 뜻밖의 말에 신음소리를 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임금은 유자광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가? 의견을 내어보라."
"어두운 밤에 집으로 찾아가서 잡으려고 하면 혹시 도망해 숨을까 두렵습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시켜 집으로 찾아가 불러서 나오면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이 옳다. 그렇게 하자.”
임금은 승지를 불러 지시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어찌 날이 밝기만을 기다릴 것인가?”
예종은 승지 한계순에게 명하여 입직(入直)한 겸사복장 거평군 이복(李復)을 속히 입시하게 했다. 국왕의 호위를 책임지는 겸사복장은 복수(複數)로 임명하여 교대로 숙직하며 겸사복들을 인솔하여 궁궐의 경비에 임하였다. 남이는 이날 비번이었고, 거평군이 이날 궁에서 숙직하였다.
예종은 거평군에게 명했다.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 당장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잡아들여라!”
임금은 환관 신운도 함께 출동하여 남이를 집에서 불러 나오게 하는 역할을 맡겼다.
19세 젊은 임금은 남이를 잡아오라고 사람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공포가 엄습해왔다. 남이가 지금이라도 군대를 몰고 궁에 들이닥칠 것 같았다.
임금은 바로 승지에게 명하여 궁궐에서 숙직하고 있는 도총관을 불러 입시하게 하였다. 도총관은 오위도총부에 대한 명령 통솔권자로 복수(複數)로 임명하여 교대로 궁에서 숙직하게 하였다. 강순은 이날 비번이었고, 노사신이 이날 궁에서 숙직하였다.
임금은 입시한 도총관 노사신에게 명했다.
"대궐의 경계를 강화하라! 군사로 하여금 전투태세를 갖추고 대궐문을 지키게 하라!”
임금은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입직한 오위(五衛)의 위장(衛將)들에게 궁궐과 연결되는 요충지의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하였다.
"오위의 위장들은 병기를 갖추고 각소(各所)를 책임지고 지키게 하라!”
선전관은 어가(御駕) 곁에서 임금을 호위하고 임금의 행차를 소리쳐서 알리는 임무를 맡은 무관이었다. 왕의 가까이에서 왕명의 전달도 맡아 무인(武人) 승지라고도 불리었다.
임금이 어두운 밤하늘의 허공을 올려다보니, 남이가 한성 밖에 대기시킨 군대를 동원해 도성을 격파하고 궁에 들이닥칠 것 같았다. 예종은 내병조에서 숙직을 하고 있는 병조참판에게 급하게 지시를 하였다.
"대궐뿐만 아니라 한성의 사대문 경계도 엄중히 하라! 군사를 나누어 도성의 문(門)과 성(城)을 단단히 지키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