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이 전하는 복수의 레시피

by 식도락 씨네마

안녕하세요.
맛있는 영화를 찾아 떠나는 식도락 씨네마입니다.


오늘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을 통해 세상에서 제일 차갑고 달콤한, 그렇기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복수의 맛을 함께 음미해 보실까요?














누나, 죽으면 우리가 놀던 강가에 묻어 달라 그랬던 거 기억나?
나 원래 청개구리잖아.


청개구리 이야기를 아시나요?


엄마의 말이라면 뭐든 반대로 행동하던 청개구리는 결국 엄마를 화병에 걸리게 만들었지요.

엄마 청개구리는 마지막 유언으로 자신이 죽으면 강가에 무덤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들이 이번에도 자신의 부탁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할 것이라 예측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청개구리는 엄마 청개구리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고자 엄마 청개구리를 강가에 묻습니다.


전 착한 사람입니다.
성실한 근로자지요.


<복수는 나의 것>의 주인공 류가 초록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 누구보다도 아끼던 누나를 강가에 손수 묻는 장면은 자연스레 청개구리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자 ‘성실한 근로자’로 소개한 류는 사실 우물 안에 갇힌 청개구리였습니다. 누나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 오히려 누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비극을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류의 도덕적 해이는 과연 ‘누나를 위하는 착한 동생의 희생’이라는 ‘선의’로 포장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요?



영화에서 스스로가 착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해 온 또 다른 인물로는 동진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진 또한 자신의 딸을 유괴해 죽게 만든 류에게 복수하기 위해 한순간에 살인자로 변모합니다.


동진이 류를 죽이기 전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라고 말하는 장면은 인간이 생각보다 선과 악의 경계를 쉽게 허물어버리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 인물은 모두 복수를 ‘정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합리화하며 살인을 비롯한 악한 행동을 죄책감 없이 저지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의 복수는 연쇄적인 비극을 낳기만 할 뿐 그 누구의 상처도 치유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복수는 나의 것>은 선악의 이분법적인 구분과 권선징악의 클리셰를 거부한 채, 복수는 결국 그 누구의 것도 되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지만 복수가 다 이루어지고 나면 어떨까?
아마 숨어있던 고통이 다시 찾아올걸?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올드보이>의 화면은 녹색과 적색이 주를 이루는데, 여기서 녹색은 마치 녹이 슬듯 긴 세월 동안 삭아버린 주인공 오대수의 영혼에 대한 메타포처럼 활용됩니다.


어두운 녹색의 부정적 의미로는 불행이나 죽음, 또는 독(poison)이 있습니다. 오대수와 이우진의 악연이 시작된 ‘상록고등학교’의 ‘록’, 그리고 오대수의 옥중 일기가 쓰인 노트의 녹색 표지에서 녹색이 이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적색은 오대수의 고통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오대수가 공중전화박스 앞에서 실종되는 장면에서 도로에 그려진 빨간색 통행금지표시와 미도의 적색 의상은 미도가 곧 이우진이 15년간 철저히 계획해 온 ‘숨어있던 고통’임을 암시합니다.


또한 녹색과 적색은 보색 관계라는 점에서, 이는 오대수와 미도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이우진과 이우진의 누나를 상징하는 색은 자주색입니다.


자주색은 이우진의 누나가 자살하기 전 입고 있던 의상을 비롯해 이우진의 선물상자와 손수건 등에서 등장하는데요. 이는 누나를 향한 사랑과 복수에 대한 이우진의 집착을 상징함과 동시에, 이우진을 향한 복수를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오대수가 사실은 이우진의 모든 설계와 통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Laugh, and the world laughs with you; weep, and you weep alone).


자신의 딸이 미도라는 것을 알게 된 오대수는 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기억을 지우기 위해 최면술사를 찾아가는데요. 이후 영화에서는 최면이 성공했는지 혹은 실패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지만, 미도와 재회하는 오대수의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복잡 미묘한 표정에서 그가 기억 삭제에 실패한 채 모든 진실과 고통을 감당하는, ‘몬스터’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올드보이’는 ‘늙은 소년’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졸업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주인공인 오대수는 상록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에 반해 이우진은 상록고등학교의 졸업생이었다는 점, 그리고 누나의 죽음 후 15년 동안 자신의 시간을 멈추었다는 점에서 ‘올드보이’는 사실 오대수가 아닌 이우진을 지칭하는 단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우진의 복수는 끝이 났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어린 소년의 모습 속에 머무르며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복수 3부작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은 <친절한 금자씨>입니다.


‘친절하다’는 것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정겹고 고분고분하다는 뜻입니다. 한편 ‘착하다’는 것은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그렇다면 주인공 이금자는 왜 주변 사람들로부터 ‘착한 사람’이 아닌 ‘친절한 사람’으로 평가됐을까요?


그것은 이금자의 이타적인 행동이 자신의 성공적인 복수를 위한 수단으로써 취했던 ‘태도’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금자는 교도소에서 다른 수감자들로부터 ‘친절한 금자씨’라고 불리면서도 동시에 ‘마녀’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는 이금자라는 인물의 이중성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녀는 천사처럼 친절하고 이타적인 면모를 보이면서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다른 죄수를 살인하는 등 잔인하고 냉혹한 모습을 보이지요.


이금자가 출소 후 전도사가 건넨 두부를 엎어버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힙니다. 이 장면은 복수를 향한 이금자의 굳은 결의와 인간의 위선에 대한 냉소를 보여줍니다.

이때 등장하는 비발디의 세속 칸타타 ‘그만두어라 이제는 끝났다’ 중 2악장 아리아 <나의 슬픔만을 강요하는가>는 아르카디아 지역에 살던 양치기 목동이 그의 연인 도릴라와의 이별을 애도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배신감에 휩싸인 목동이 결국 도릴라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서사를 그리지요.

이는 복수의 감정이 인간을 지배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복수심의 분출을 주요한 정서적 축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친절한 금자씨>와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금자는 원모를 위해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하고, 원모의 부모를 찾아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며 용서를 비는 등 죄책감 속에서 죄 사함을 받으려 하면서도 백선생을 징벌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죄를 짓게 되는 모순을 자초하는 인물입니다.

이금자가 백선생에게 복수하기 전 딸과 대화를 나눌 때 배경의 색이 주황빛, 검붉은 빛 등으로 계속 바뀌는 장면은 온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촛불을 연상시키며, 동시에 속죄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복수를 꿈꾸는 이금자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금자가 본격적인 복수를 시작할 때 입고 있는 옷은 파란색 코트인데, 여기서 파란색은 초가 활활 타오를 때 심지 가장 안쪽에서 보이는 색으로 이금자의 강렬한 복수심을 상징합니다. 이는 이금자가 교도소에서 입고 있었던 노란색 죄수복과의 보색 대비를 이루며 이금자라는 인물의 이중성을 시각적으로 부각합니다.



이금자는 복수를 끝마친 후 딸에게 선물한 하얀 케이크를 먹지 않고 얼굴을 케이크 속으로 묻어버리는데, 이때 하얀색은 이금자가 그토록 원했던 속죄 혹은 순수, 구원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아이들의 부모들과 검은색 초콜릿케이크를 나누어먹는 장면에서는 검은색이 죄 혹은 파멸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부모들은 아이를 잃은 피해자이지만 백선생에 대한 조직적 복수를 실행하며 죄를 짓게 된 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케이크를 나누어 먹는 장면에서 그 누구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케이크를 먹던 와중 사건과 전혀 무관한 빵집 직원 근식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학부모들은 모두 자리를 뜹니다.


이는 백선생을 향한 복수가 개인적 복수가 아닌 조직적 복수였다는 점에서 살인에 대한 죄의식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근식과 같은 무결한 존재를 마주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장면입니다.






복수심은 건강에 좋다.
하지만 복수가 다 이루어지고 나면 어떨까?
아마 숨어있던 고통이 다시 찾아올걸?


백선생이 죽은 뒤에도 후련함보다는 아이들의 빈자리로부터 여전한 슬픔을 느끼는 부모들, 그리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흘리는 이금자의 모습은 <올드보이> 속 이우진의 대사를 곱씹어보게 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꿈꿔왔던 복수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안겨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은 단순히 복수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그리지 않습니다. 대신, 복수가 불러일으키는 죄책감과 새로운 고통을 보여주며 복수라는 행위를 통해 승리를 얻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메세지를 전하지요.

결국 모두 비극적 결말과 함께 막을 내리는 세 작품은 관객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복수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구원인가, 또 다른 상처와 고통인가?








<복수는 나의 것>: 달지만 목 막히는 밤만쥬의 맛(4/5점)


<올드보이>: 치명적인 향에 속아 마셨다가는 혀가 단숨에 녹아내릴 고량주(4/5점)


<친절한 금자씨>: 달콤함 속 씁쓸함을 드러내는 티라미수 같은 맛(5/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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