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맛있는 영화를 찾아 떠나는 식도락 씨네마입니다.
오늘은 트라우마와 필연적 운명 앞의 무력감을 색다른 관점에서 조명한 아리 에스터의 영화들을 함께 음미해 보실까요?
헤라클레스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더 비극적일까? 아니면 덜 비극적일까?
첫 번째 영화는 <유전>입니다.
영화의 첫 수업 장면에서 논의되는 ‘선택 가능한 비극과 불가능한 비극’은 이 영화의 핵심 질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 애니의 어머니 앨런은 생전 악마 파이몬을 숭배하던 종교집단의 수장이었으며, 파이몬을 소환하기 위해 가족의 희생까지도 서슴지 않았는데요. 이로 인해 애니의 자녀인 찰리와 피터가 파이몬을 소환하기 위한 의식의 숙주로 선택되면서 애니의 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닥치게 됩니다.
비극적 운명을 거부하고자 했던 애니의 저항은 오히려 앨런의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행시키는 모순을 초래합니다. 이와 같은 서사는 전지적 존재와의 대립을 무력화함과 동시에, 무지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파이몬 만세!
앨런이 숭배하던 파이몬은 왕관을 쓴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한 남성으로 전해지며, 루시퍼의 충실한 부하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이몬은 소환자에게 명예를 주어 사람들에게 존경받게 하는 능력이 있는데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피터의 몸을 차지한 파이몬이 왕관을 쓰고 숭배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파이몬에게 은혜를 받으려면 그를 만족시킬만한 공물이 필요한데, 영화에서 이 공물은 바로 머리입니다. 파이몬의 소환을 위해 세 명의 여성의 머리를 바치는 설정은 참수 모티브와 연결되며, 이는 필연적 운명 앞에 놓인 개인의 무력감을 탐구하는 메타포이기도 합니다.
결국 애니는 파이몬에게 깃들게 됩니다.
미니어처 조형가인 애니가 자신이 겪은 과거의 비극을 미니어처로 재현합니다. 이 미니어처가 등장하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수미상관을 이루며 애니의 운명이 파이몬의 손 안에 달려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
유전의 사전적 정의는 ‘어버이의 성격, 체질, 형상 따위의 형질이 자손에게 전해지는 현상’인데요. 이러한 점에서 영화 제목 ‘유전’ 또한 악마에게 헌신하는 운명의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유전>은 가족의 혈통을 악마적 의식을 위한 도구로 재해석하며 신선한 공포감을 선사했다는 평을 받습니다.
네게도 그 기회가 주어진 거야.
두 번째 영화는 <미드소마>입니다.
<유전>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이 겪은 과거의 사건을 미니어처로 재현해 내는 반면, <미드소마>는 하르가 공동체의 치밀한 계획을 보여주는 벽화를 등장시키며 시작과 동시에 영화의 결말을 암시합니다. 이는 관객에게 필연적 결말을 향한 긴장감과 불안감에서 비롯된,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공포감을 안깁니다.
저분들에겐 커다란 기쁨이에요.
영화의 제목인 미드소마는 90년에 한 번씩 9일간 열리는 하지제인데요. 갑작스럽게 가족을 잃은 후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온 주인공 대니는 그녀의 남자친구 크리스티안 일행과 함께 하르가라는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 머물게 되면서 미드소마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저 평화롭게만 보였던 축제의 분위기는 노인을 절벽에서 투신하게 하여 제물로 바치는 ‘에테스투파’ 의식을 시작으로 뒤집힙니다.
이에 큰 충격을 받고 경악하는 대니와 일행들과는 달리, 의식을 아무렇지 않게 의식을 거행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상당히 광적으로 비춰집니다. 이처럼 하르가의 의식은 공포와 치유라는 상충하는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가족은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야.
너도 가족이 필요해.
5월의 여왕으로 선발되어 의식의 제물로 바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된 대니는 자신을 배신한 크리스티안을 제물로 선택하게 됩니다. 이후 의식이 진행되는 광경을 보며 미소를 짓는 대니의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되지요.
하르가의 따뜻한 환대에 마음을 열었던 외지인들이 결국 제물로 희생되었듯이, 마을 사람들의 광기에 동화된 대니 역시 크리스티안을 제물로 바치기 위한 하르가 공동체의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맙니다.
결국 대니는 크리스티안을 향한 정서적 의존에서 벗어났지만, 새로운 의존 대상인 하르가의 덫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옳은 선택을 할 거라고 믿으마.
마지막 영화는 <보 이즈 어프레이드>입니다.
앞서 종교를 소재로 비극적 서사를 전개한 <유전>과 <미드소마>와는 달리, 이 영화는 주인공 보의 시점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증오의 감정들을 초현실적으로 해석합니다.
감독은 이 영화가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 즉 자기 자신에 갇힌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 ‘보 이즈 어프레이드(Beau Is Afraid)’는 사랑을 명목으로 아들에 대한 집착 및 통제를 당연시하는 보의 어머니 모나로 인해 편집증을 앓게 된 보의 심리를 투영합니다.
편집증은 ‘대상에게 적의가 숨어 있다고 판단하여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증상 혹은 망상장애’인데요.
이에 따르면 보의 말을 끊임 없이 의심하는 것을 넘어서 보의 정신과 상담 내용을 몰래 보고 받기까지 했던 모나 또한 편집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편집증의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이 유전적인 요인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보의 편집증 또한 유전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있겠지요.
죄송해요. 저는 못된 아들이에요.
영화는 총 5개의 챕터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1장은 혼돈과 불안의 세계를, 2장은 억압과 통제의 공간을, 3장은 환상과 도피 및 자아의 분열을, 4장은 어머니와의 대면과 죄책감의 정점을, 그리고 마지막 5장은 심판과 결말을 보여줍니다.
그중 결말 파트인 5장은 보가 어머니의 집에서 빠져나와 배를 타고 가던 중 마주친 한 동굴로 들어가며 시작되는데요. 그 동굴 속에서 보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심판을 받습니다.
보는 죄인으로 몰리게 되고, 타고 있던 배에 발이 붙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배가 뒤집히면서 물속에 빠져 죽게 됩니다.
당신의 모험은 몇 년이고 계속되겠지.
이후 그의 심판을 지켜보던 방청객들이 하나 둘 자리를 비우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때 그가 타고 있던 배는 보 그 자신의 삶에 대한 메타포로 기능합니다. 어머니가 통제하던 작은 세상에서 벗어나 바다처럼 넓은 세상으로 향하려 했으나, 결국 동굴 같은 작은 세상에 또다시 갇혀 타인의 심판을 받다가 마치 뒤집힌 배처럼 제대로 망가지게 되었으니까요.
방청객들이 심판장을 빠져나가는 장면 또한 삶을 살아감에 있어 누군가에게 계속 감시받는 듯한 정서적 압박이 죽은 후에야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를 감시하는 CCTV, 프라이버시가 노출되는 방안 창문, 보의 모습을 허락도 없이 촬영하는 여자 아이, 그리고 보의 발에 달린 위치추적기 또한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보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아리 에스터 감독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비롯되는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섬세하고도 신선한 방식으로 재해석합니다.
다소 기괴한 연출로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인간의 심연을 거침없이 파고드는 그의 작품은 다른 작품에서 쉽게 경험해보지 못할 여운을 남기며 수많은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있습니다.
유전: 악마의 초콜릿케이크(4/5점)
미드소마: 잘라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미궁의 파이(4/5점)
보 이즈 어프레이드: 삼다수 말고 ‘삶’다수(4.75/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