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신돌석, #056 을사늑약 체결, 이완용 내각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by 연결고리

시대 읽기


#056 을사늑약 체결, 이완용 내각, 국권 피탈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인물은 초대 통감이며, 안중근에게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그는 강압적인 방식으로 조약 체결을 강요했고, 고종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의정부 회의와 중추원 심의를 거쳐 황제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대한제국의 법을 위반합니다. 그리고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을 무단으로 가져와 날인했기 때문에 을사늑약 체결은 처음부터 무효이자 불법 행위였습니다.1)


당시 대신 중에는 조약 체결에 적극 반대한 사람이 있는 반면, 소극적 반대 의견을 내다가 찬성으로 바꾼 사람이 있고,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찬성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조약 체결에 찬성한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5명의 대신은 을사오적이 됩니다.


을사늑약을 계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통감부라는 통치기관이 설치되기 때문에 대한제국은 이때 실질적인 국권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을사늑약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정부와 일본국정부는 양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 공통의 주의를 확고하게 함을 원하여 한국의 부강지실(富强之實)을 인정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하여 아래 조관을 약정함.

 제1조 일본국정부는 도쿄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에 한국이 외국에 대하는 관계와 사무를 감리·지휘함이 가하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신민과 이익을 보호함이 가함.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한국정부는 금후에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아니하고 국제적 성질을 갖는 하등의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기로 상약(相約)함.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闕下)에 1인의 통감(Resident General)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감리함을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폐하를 내알(內謁)하는 권리를 가짐. 일본국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과 기타 일본국정부가 필요로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Resident)을 두는 권리를 갖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일체 사무를 관리함이 가함.
 제4조 일본국과 한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과 약속은 본 협약 조관에 저촉하는 것을 제외하고 모두 그 효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함.
 제5조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한다.

위에 의거하여 하명(下名)을 각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 조인한다.


광무(光武) 9년 11월 17일 외부대신 박제순
메이지(明治) 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 이토 히로부미2)



대한제국의 외교를 일본 정부가 대표하여 처리한 사건으로 ‘간도협약’ 체결이 있습니다. 간도는 오래전부터 조선인이 이주하여 간척한 땅이었기 때문에 청과 영토 분쟁을 겪었고, 숙종 때 '동쪽으로는 토문강,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청으로부터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간도를 청에 팔아넘깁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은 해외에 있는 국민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해외에 설치된 대한제국의 공사관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자신들의 제반 업무를 일본 영사관에서 처리해야 했습니다. 즉, 재외국민과 외국인의 입장에서 대한제국은 이미 없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전국에서 거센 저항이 일어납니다. 이때 일어난 의병이 을사의병이며, 신돌석은 이때 평민 의병장으로 나서 활약합니다.


지방에서 의병이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1907년이 되면 대한제국의 위기는 한층 고조됩니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외교활동을 전개합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인데, 이들은 일본의 방해와 서양 열강의 외면으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때 대한제국 내각의 총리대신으로 을사늑약 체결에 적극 찬성했던 이완용이 임명됩니다. 그는 일본의 요구에 부응하여 행동했는데, 을사늑약을 위반하고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고종의 외교활동을 문제 삼아 그의 퇴위를 주도한 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 정부에는 통감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차관을 두게 되어 일본은 대한제국의 행정권까지 장악합니다.3)


이완용의 행위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언론 탄압을 위해 신문지법을 제정했는데, 이것은 이완용 내각의 1호 법률이었습니다.4) 게다가 고종의 강제 퇴위로 민중의 시위가 격해지고, 대한제국 군대가 직접 봉기에 가담하여 일본 경찰과 교전하는 일이 발생하자 일본은 다급하게 한국군 해산을 위한 일본군 병력 배치를 완료한 후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합니다. 그리고 군대 해산 시에 발생하게 될지도 모를 한국군의 봉기를 철저히 진압해 줄 것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의뢰하는데 이때의 당사자도 바로 이완용이었습니다.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과정은 비참하고 굴욕적이었습니다. 맨손 훈련이라는 거짓말로 사병들을 집합시킨 후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일본군 부대가 이중 삼중으로 포위한 상황에서 해산되는데, 이들의 해산은 일본의 막대한 무력 투입과 친일 매국 정부의 배신행위로 용의주도하게 강행된 것입니다.5)


의병에 합류한 해산 군인은 정미의병이 되어 일본과 친일 정부에 저항했지만, 일본에 대한 친일 세력들의 충성경쟁은 치열해졌고, 그만큼 의병 탄압도 거세졌습니다.


결국 정미의병의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했고, 일본은 남한대토벌작전을 실시하여 의병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까지 장악한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최종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습니다.


결론적으로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중은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지방에서 의병활동이 그랬고, 중앙에서는 애국계몽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국권회복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독립신문’은 폐간되었지만 그 정신을 이어 받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의 민간 언론이 발행되어 일본의 침략적 행위를 고발했습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될 때에는 전국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는데, 자결로써 일제의 만행에 저항한 인물이 있었고, 언론에 글을 실어 조약의 부당함을 논한 사람도 있었으며, 조약 체결에 앞장선 대신들을 암살하기 위한 오적암살단이 결성되기도 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경제적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국내 최대 항일 비밀 결사인 신민회가 결성되어 공화정 수립과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학교 설립·민족 산업 진흥·계몽 활동 등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중앙과 지방에서 이뤄진 민중들의 국권 수호 활동은 일본의 폭력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친일 세력은 점점 몸집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했을지언정 이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이들의 신념은 국권 피탈 이후에도 독립운동으로 계승됩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자부심을 갖고 자랑해야 할 정의의 역사입니다.


이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기에 옳은 일을 선택한 한 청년의 생애를 살펴보겠습니다.


1) 길윤형, 「봉인도 안된 을사조약 문서…‘불법 국권탈취’ 확인」, 한겨례신문, 2009.12.31
2)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2, 국사편찬위원회, 2002, 235쪽
3) 「이완용」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4) 「신문지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5) 「군대해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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