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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결고리 Jul 25. 2023

청년 김마리아, #079 손진주 교장과의 만남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청년 시절 읽기


#079 손진주 교장과의 만남, 그리고 일본 유학


김마리아를 정신여학교 교사로 부른 사람은 당시 교장이었던 루이스 선교사(Lewis, Margo Lee)였습니다. 그녀의 한국 이름은 손진주였고, 김마리아보다 7살 더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청년 손진주는 김마리아의 정신적·경제적 후견인이었는데, 청년 김마리아를 초빙한 것이 청년 손진주였고, 김마리아의 일본유학 비용을 부담했으며, 일제에 의해 고문받아 투병 중인 김마리아를 간병했던 인물 역시 그녀였습니다.


손진주가 선교지로 낙후된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한국에는 여성 교육이 없었고, 그런 이유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손진주였기 때문에 외국인으로서 한국 여성 교육에 그토록 헌신적이었고, 열과 성의를 다하여 김마리아를 후원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선교부에서는 여자 선교사가 결혼을 하면 선교 사업을 그만두는 관례가 있어서 정동여학당(정신여학교의 전신) 운영 시절 여선교사가 결혼을 하여 매년 여성 교육자가 바뀌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진주는 다른 여선교사들과 달리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선교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가장 오랜 기간 교장으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국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후원을 받았는데 이것은 한국에서의 선교 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1)


청년 손진주는 교장으로서 많은 역경을 겪습니다. 3.1운동 당시에는 김마리아를 포함하여 정신여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체포되는 수난을 겪었고, 일제가 정식 학교로 인정해주지 않아 학교가 폐교가 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또 3.1운동 7년 후에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학생들이 참여하여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강압에 손진주는 언제나 단호했고, 끝까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자 그녀는 교장직에서 해임되고 재단법인은 해체됩니다. 그 후에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했고, 이때 손진주도 한국을 떠나게 됩니다.2)


언어가 통하지 않고, 풍습도 다르며, 환경은 불편하고, 여성 차별이 존재하는 한국에 신앙심 하나로 25세의 나이에 홀로 한국 땅을 밟은 청년 손진주. 결혼도 하지 않고 미국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더 긴 32년을 오로지 한국인을 위해 살았던 손진주는 진정한 선교사의 삶을 몸소 실천했던 것입니다.


김마리아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청년 교장은 김마리아의 명석한 두뇌와 조국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확인한 후 김마리아를 여성 지도자로 키우고자 그녀에게 일본 유학을 제안합니다. 이때 김마리아는 교사 활동을 잠시 멈추고 유학 제안을 수락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유학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학업이라는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의 의지와 열정에도 불구하고 여성 교육 사업에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던 당시 상황에 좌절감을 느꼈기 때문에 유학을 선택한 것입니다.3) 


현모양처 육성이 여성의 교육 목적이었던 시대에 여성 인재 양성은 물론 여성 중심의 독립투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마도 더 높은 학력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관심을 끌어 세상을 바꾸기로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결심에는 고모인 김필례의 영향도 있었을 것입니다. 김필례는 김마리아의 고모로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교육자입니다. 그녀는 뛰어난 성적으로 2년을 월반하여 정신여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고, 졸업 후 국권 피탈 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그녀의 유학 과정은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될 정도로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는데, 고모의 도전 과정은 김마리아에게 큰 자부심과 의욕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4) 


1915년, 24세의 김마리아는 이미 일본에서 유학 중인 김필례와 같은 학교에 입학합니다. 당시 일본에는 한국인 유학생 중심의 친목회가 운영되었는데, 이것이 남자들 중심으로 운영되자 김필례는 10여 명과 함께 여자 유학생 친목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필례가 정신여학교의 부름으로 귀국하자 김마리아는 김필례를 이어 이 단체의 임시회장이 됩니다.5) 여자 친목회에서의 활동은 그녀가 여성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드러난 첫 번째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첫 사업은 여성 종합잡지인 『여성계』를 발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김마리아는 이 활동에서 단순히 여자들의 평등한 지위 확보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기획·편집·기고 활동에서 남자 유학생들의 지원과 교류를 이끌어 냅니다. 


그녀는 단체의 규모와 역량도 증대시켰는데, 일본 각 지방에서 공부하던 여자 유학생을 중심으로 친목회 지회를 조직하였고, 여성계 발행을 위해 회원들뿐 아니라 한국으로부터도 기부금을 확보하여 상당한 액수의 회비를 적립시키기도 합니다.6) 


김마리아의 탁월한 조직 운영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여성들의 권익 확대를 위해 잡지를 발행하고, 여성 문제 개선 활동에 남성들과 연대하며, 일본의 각 지방으로 조직을 확대하거나 고국으로부터 후원금을 확보하는 일은 아마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녀가 이처럼 학업 이외의 활동에 열심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김마리아는 유학 시절 일본어 강독·작문·문법 과목을 어려워했고, 절친했던 일본인 친구는 그녀가 일본어가 능통하지 않아 공부를 도와주었다고 회고했습니다.7) 청년 김마리아에게도 유학 생활은 이처럼 개인 학업만으로 벅찬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 유학생들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의를 갖고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이익’보다 ‘공동체’를 더 가치 있게 여겼던 청년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1)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00·131-132쪽
2) 「[용어해설] 루이스4 [Lewis, Margo Lee 1885- ?]」, CPORTAL(cportal.co.kr), 2004.4.11
3)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34쪽
4)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10-111, 134쪽
5)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36-138쪽
6)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38-139·141쪽
7)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35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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