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김마리아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지 수년이 지나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지도 거의 10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청년들은 그 속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을까요? 민족이 처한 상황에 대한 울분이었을까요? 아니면 현실을 외면하고 오로지 자기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었을까요?
김필례가 여자 유학생 친목회를 조직할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인 학생은 약 350명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이들은 당대에 내로라할 신지식인이었습니다.1)
일제강점기는 그들이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현실이었고, 그들 스스로가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했기 때문에 그들의 고민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개인의 출세만을 희망했다면 현실과 타협하는 길이 가장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청년답게 식민지 현실에 분노하고 독립 활동에 열의를 불태웁니다.
그들의 도전이 바로 1919년 3.1운동에 불을 지핀 2.8독립선언입니다. 도쿄의 2.8독립선언은 그저 3.1운동 이전에 별개로 일어난 유학생들의 민족 운동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역사를 주도한 청년들의 활동과 그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18년 1월,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지만 국외 상황과 달리 일제는 고의적으로 발표 내용을 은폐하여 한반도 내에는 그 사실이 즉시 알려지지 못합니다. 하지만 상하이나 미국의 민족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대응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8년 12월, 도쿄에서 발행된 한 신문에 두 가지 사실이 실립니다. 하나는 재미동포 3인을 민족 대표로 하여 강화회의가 열리는 파리에 파견한다는 소식이고, 또 하나는 재미동포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한다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에 일본 유학생들은 흥분했고, 이들은 민족 전체의 의사를 표시해야 할 거족적인 투쟁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읍니다. 그리고 그 선봉이 자신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행동에 옮깁니다.2)
민족이 겪고 있는 불의에 분노하고 의로운 행동을 위해 거침없는 도전을 시도했던 그들은 참 청년이었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배 청년이었습니다.
일본 유학생들은 1918년 12월 학우회 주최 망년회와 1919년 1월 신년 웅변대회 등의 자리에서 민족운동에 대한 뜻을 모으고, 자신들이 앞장서서 희생까지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는 청년 김마리아를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함께 뜻을 모아 자금을 모으며 2.8독립선언을 준비합니다.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청년들은 독립선언서를 일본의 대신들과 의원들, 각국 대사와 조선총독부, 신문사에 발송했습니다. 그리고 선언일 오후 2시, 약 400여 명의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고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아 식장 내외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들은 시가행진을 하려고 했으나 곧 나타난 일본 경찰들에 의해 참여자 다수가 체포되었고, 일본 경찰이 학생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김마리아의 자금 후원 사실이 알려져 그녀도 체포됩니다.3)
이런 대대적인 탄압에 청년들은 물러섰을까요? 그들의 피는 더 뜨겁게 끓었습니다. 유학생들은 자신들이 벌인 2.8독립선언의 사실을 고국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학생들 중 이를 실천하기 위해 얼마나 돌아왔을까요?
2.8독립선언에 관계한 청년 600여 명 중 귀국하여 민족운동의 선두에 서게 된 사람이 무려 359명이나 됩니다. 이것은 민족의 자랑으로 삼을 만한 일이고, 이런 청년들의 활동이 국내의 종교지도자들로 하여금 3.1운동을 조직하도록 도운 것이니4) 2.8독립선언은 시대를 바꾼 청년들의 역사적 도전이었습니다.
359명의 청년 중 하나였던 김마리아는 당시 귀국 명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손진주 교장이 학교 문제 해결을 위해 귀국을 요청하자 뜻을 이룹니다. 당시 김마리아는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영달을 고려했다면 귀국을 조금 늦출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귀국 후 만난 고모가 이제 곧 졸업인데 학교는 어떻게 했냐고 묻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김마리아는 “고모, 나라도 없는 마당에 졸업장은 해서 무얼 해요”라고 대답해 고모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5) 당시 그녀에게 개인의 성공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김마리아는 이 시기 동갑 유학생 친구였던 차경신을 찾아갑니다. 김마리아는 차경신과 2.8독립선언서 국내 반입을 논의하고 둘이 함께 밀입국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국내에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키자는 기도 제목으로 두 사람은 1주일 동안 새벽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그만큼 간절했습니다.
그들은 귀국을 위해 관부연락선을 타야 했는데, 이때 일본 경찰의 까다로운 검문이라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 여인으로 변장한 후 2.8독립선언서를 옷에 숨겨 귀국에 성공합니다.
당시 차경신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를 구실로 귀국한 것인데 부모 잃은 아픈 마음을 뒤로 하고 민족 운동을 우선하여 헌신한 태도는 서울진공작전의 의병 총대장 이인영과 대비됩니다.
2.8독립선언 당시만 하더라도 차경신은 유학생 모임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김마리아와의 만남을 계기로 차경신은 독립운동의 생애를 살게 됩니다.6) 이렇게 28세의 청년은 또 다른 청년의 삶을 바꾼 것입니다.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억압하고, 헌병 경찰의 자의적인 즉결 심판으로 탄압하고, 태형제도로 매질을 가하고, 교육 차별을 자행하고, 각종 법령을 통해 경제적 자원을 약탈한 일제의 폭압적 지배에 한이 맺힌 청년들의 분노는 맹렬한 것이었고, 그것이 표출되자 역사는 발전하게 됩니다.
그들 청년의 마음에는 ‘나’보다 ‘민족’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고, 공동체를 향한 애틋한 열의는 그들을 하나로 ‘연대’시켰으며, 하나 된 집단의 도전은 민족 전체를 3.1운동이라는 독립운동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의는 임시정부 수립, 의열 투쟁, 해외의 독립운동으로 확산됩니다. 이런 것들을 거침없이 이뤄내는 존재, 그들이 바로 청년인 것입니다.
1)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36쪽
2) 「3.1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45쪽
3)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47-148쪽
4)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 6, 인물과 사상사, 2008, 140·143쪽
5)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50-151·153쪽
6) 윤정란, 「식민지 한국 여성 차경신의 민족운동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2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3.12, 166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