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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결고리 Jan 03. 2024

청년 김마리아, #082 귀국 직후의 상황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청년 시절 읽기


#082 귀국 직후의 상황과 3.1운동의 발발


귀국하여 부산에 도착한 청년 김마리아는 대구를 거쳐 언니가 있던 광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차경신과 함께 이동하던 중 대구에서 뜻밖의 일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바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작은고모 김순애와 큰고모부 서병호를 우연히 만난 것입니다. 


김순애는 김마리아보다 3살 많은 청년으로, 교사로서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를 몰래 가르치다가 일제에 여러 번 단속을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김마리아보다 7살 많은 청년 서병호 역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1)


김순애는 국내로 들어오기 한 달 전 김규식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도 잠시, 김규식은 당시 민족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고, 김순애는 서병호와 함께 남편의 활동을 지원할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정세 확인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게 됩니다.2)


각자가 처한 절박한 상황에서 서로의 상황을 모른 채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던 사람들이 우연히, 그것도 다른 활동이 아닌 바로 독립운동 중에 가족을 만났을 때 그들 각자는 서로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그 감격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오래전에 만남을 설계해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 만남은 적절한 때에 용기를 북돋워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민족 운동에 처음 발을 내디딘 청년 차경신에게도 같은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구에서 만남의 감동도 잠시, 차경신은 3.1운동을 논의하기 위해 홀로 서울로 이동했고, 김마리아 일행은 그들의 가족이 거주하고 있는 광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광주에 도착한 후 작은고모와 큰고모부도 각자 임무를 위해 서울로 바로 떠났고, 김마리아는 일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막내 고모부 병원에서 수백 장 복사한 뒤 곧 서울로 떠났습니다.3) 가족들과 그리웠던 만남에 대해 회포를 풀 겨를도 없이, 사명을 지닌 청년들은 이처럼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1919년 2월 21일. 서울에 도착한 김마리아는 먼저 학교를 찾아가 손진주의 요청을 해결해야 했는데, 당시는 일제에 저항하려는 학생들과 이를 말리려는 교사들 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고종의 죽음은 3.1운동의 배경 중 하나였는데, 당시 고종은 일본인의 독살로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학생들은 검은색 상장(喪章, 죽음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가슴에 다는 표식)을 달아 애통한 마음과 저항의 의지를 표현하게 됩니다. 그러자 총독부의 제재가 있을까 봐 염려되었던 손진주는 학생들에게 검은 상장을 풀라고 명했는데, 여기서 학생들과 갈등이 발생했고, 선생님 말을 거역하는 일부 학생들을 정학 조치하자 학생들은 일주일 동안 동맹휴학을 했던 것입니다.4)


교장과 학생 모두는 각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행동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때 교장의 마음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가 청년들에게 가졌던 마음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교사의 입장에서 학생들이 정치적 행위를 하여 일제의 탄압을 받는다면 그것만큼 가슴 아픈 일이 어디 있을까요? 또 전통적인 관점에서 학생의 본분은 실력 향상에 매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회문제는 어른들이 나서야 하는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는 어른조차 나서기 어려운 억압된 상황이었으므로 누군가 나서지 않는다면 역사는 그 상태 그대로 정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강도로, 어느 속도로, 어느 방법으로 행동해야 할지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이지만, ‘행동을 해야 하는 것’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중요하고, 나라를 위한 마음도 중요한 상황에서 손진주의 경제적 후원과 정서적 지지 속에 그 시대 남성도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유학까지 다녀와 사회적 지위를 얻은 청년 김마리아는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요?


학교로 돌아온 김마리아는 교장의 뜻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신여학교 교사와 함께 여성들의 민족 운동을 논의하며 분주한 시간을 보냅니다.5) 


지금 시대에 교사가 교장의 의견을 거부하고, 학생들의 편에 서서 학생들과 함께 의로움을 좇아 행동하면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그들의 의로운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치 단체들이 이 사건을 이슈화시키고, 교사는 학생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아 『죽은 시인의 사회』에 등장하는 키팅 선생님처럼 학교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김마리아가 처한 현실에는 고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입니다. 이미 현실 자체가 불법이었던 시대인 것입니다. 


당시의 학교 교육은 규율이 상당히 엄격했는데, 김마리아도 그런 상황에서 학생으로 공부했고, 교사로서 지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마리아는 누구보다도 학교 방침을 따라 행동해 왔습니다. 하지만 민족 문제에서만큼은 단호했기 때문에 보수적인 김마리아조차 교장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청년 김마리아의 행동에 손진주는 개인적으로는 섭섭했겠지만, 그녀는 훗날 감옥에 갇히고 고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김마리아를 끝까지 보살펴 준 멘토였기 때문에 결국은 김마리아의 확고한 신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3.1운동이 열흘도 안 남은 상황에서 김마리아는 이제 도쿄에서 함께 공부했던 유학생이나 각계 인사들을 찾아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해야 했습니다. 2월 26일에는 3.1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천도교 본부와 3.1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찾아가 2.8 독립 선언 당시의 상황을 전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할 때라는 의견을 주장하는데, 이때 국내에서도 이미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합니다.


이제 그녀는 여성 중심의 독립운동 단체 조직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자금 모금을 위해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급히 서울로 돌아옵니다.6)



1) 전병무, 「[독립운동가 열전] 김마리아, 기독교계 항일여성운동의 대모」, 『내일을 여는 역사』 7172,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2018.9, 139쪽
2)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51-152쪽
3) 윤정란, 「식민지 한국 여성 차경신의 민족운동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2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3.12, 167쪽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52쪽
전병무, 「[독립운동가 열전] 김마리아, 기독교계 항일여성운동의 대모」, 『내일을 여는 역사』 7172, 
4)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48-149쪽
5)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58쪽
6)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58-159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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