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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결고리 Jan 06. 2024

청년 김마리아, #084 첫 번째 고문, 그리고 석호필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청년 시절 읽기


#084 체포와 첫 번째 고문, 그리고 조력자 선교사 석호필


박인덕의 집에서 항일여성단체 조직을 논의한 혐의로 여성계 지도자들은 차례로 체포됩니다. 그런데 경찰서로 끌려간 사람들과 달리 김마리아만 조선총독부 경찰 최고 지휘부인 경무총감부로 연행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그녀가 겪게 될 조사과정이 매우 가혹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1)


간혹 영화에서 일제의 심문 장면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그 장면을 역사적 고증을 거쳐 재현한다면 그 장면이 너무 잔인하여 아마 상영 불가 판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행했던 고문 방법을 『차이나 프레스(The China Press)』의 베이징 특파원은 다음과 같이 고발했습니다.


어른이건 소년이건 팔이 몸통에 묶이어 천장에 매달린다. 그러므로 그들의 몸무게는 어깨에 매달리며 정신을 잃을 때까지 올려졌다 내려왔다 반복한다. 그들의 손가락은 빨갛게 달은 철사줄로 짓눌려졌다. 그들의 벌거벗은 피부는 날카로운 갈고리로 찢기우거나 또는 달군 쇠붙이로 지져졌다. 

발톱은 집게로 뽑혀졌다. 남자들은 아주 작은 상자에 넣어지고 그러면 그 상자가 꽉 죄어진다. 그들은 단단히 묶이고 머리가 젖혀진다. 뜨거운 물이나 약품에 용해된 물, 그리고 붉은 고춧가루가 그들의 콧구멍에 퍼부어진다. 나뭇조각 꼬챙이들이 그들의 손톱 깊숙이까지 들어박혔다.2)


미국 기독교 연합회에서 발간한 자료에 등장하는 증언 기록에도 일제가 여성에게 얼마나 악랄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며 저주와 지독한 욕설을 퍼부었다. 또 내 가슴을 드러내 보이라고 명령하고 듣지 않자 웃옷을 찢어 버리고 몸서리쳐지는 온갖 못된 말을 했다. ……이렇게 하고도 시원치 않은지 몽둥이로 머리 위를 사정없이 때렸다. ……나는 경찰서에서 5일간 지낸 후에 서대문형무소에 송치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나를 발가벗겼으며 남자들은 내 몸을 보았다. 나는 조롱당하고 저주를 받았는데 도저히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3)


김마리아와 오랜 친분이 있었던 한 선교사는 ‘한국민의 용기’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3월 5일 만세를 부르다 잡혀 간 여학생들 중의 한 사람의 서한을 보면, “우리는 그 추운 밤에 발가벗기어 일본인 남자의 앞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어떤 형사부의 순사가 나더러 고양이 모양으로 네 발로 기어서 저 거울 앞을 지나가거라. 허, 네 모양이 예쁘기도 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저들이 나를 발가벗기고 흉악한 악형을 가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마음에 원통치 아니합니다. 이것도 다 내 나라를 위하여 당하는 것임에 달게 받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상류 가정에서 귀엽게 자란 서양 여인들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체면을 중히 여기는 처녀들이 웃는 낯으로 이러한 고초를 당하였다. ……일찍이 나는 한국인을 유약한 민족으로 알았었으나 현대의 한국 민족은 세계의 역사상 유례없는 용기와 자제력을 가졌다.4)


이런 사례를 읽을 때 일제강점기가 축복이었다느니, 그 덕에 한국이 발전했다느니 하는 말을 내뱉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다른 사람이 겪은 고통과 상관없이 ‘나에게 이익만 된다면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에 분노를 느낍니다. 일제에 의해 모욕과 고통을 받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생을 마친 이후에도 같은 민족으로부터 저런 파렴치한 언행을 듣게 될 때 그분들이 하늘에서 얼마나 원통해할까요? 


경무총감부에 끌려간 김마리아는 20대 여성의 몸으로 견디기 힘든 가혹한 고문을 당합니다. 그 중 김마리아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폭언을 들으며 계속해서 대나무로 머리를 구타당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김마리아는 코와 귀에 고름이 잡히는 병에 걸려 평생 심한 두통과 신경쇠약이라는 후유증을 겪게 됩니다.


약 20일 가까이 고문과 심문이 이어진 후 김마리아는 서대문감옥소로 옮겨져 독방 생활을 시작합니다. 감옥에서 구타는 일상적이었고, 아침과 점심에는 주먹만 한 작은 콩밥으로, 저녁에는 짜게 저린 가는 생선 한 머리로 배를 채워야 했으며, 물을 제대로 주지 않아 목마름을 참는 고통은 더욱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하루건너 비워야 하는 변기의 역겨운 냄새도 고통스러웠고, 일주일에 한 번씩 강제로 이용해야 하는 목욕탕의 더러운 물도 마찬가지였습니다.5) 


일제가 가한 육체적 고통이 너무 혹독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든 정신적으로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마리아는 성경을 읽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그 상황을 이겨냅니다. 특히 그녀에게 희망이 되었던 성경 말씀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유명한 시편 23편이었습니다.6)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현 상황을 가장 원망했어야 하는 그녀였지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하는 시편 23편을 읽으며 그녀는 신실한 신앙인의 자세를 지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는 김마리아와 그의 동료를 회유하기 시작합니다. 재판정에서 박인덕에게 재판관이 회유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당신이 모범수라고 들어 알고 있소. 당신은 정치범이오. 그러나 당신들의 투쟁으로 독립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당신은 순종해야만 합니다. 현모양처가 되어야지요. 한국의 젊은 소녀들에게 그런 나쁜 사상을 가르치지 마시오. 당신은 그걸 이해할 만큼 충분히 감옥 생활을 하였소. 내가 말한 대로 하겠다고 약속을 하면 석방시킬 것이오.


상황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회유의 유혹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인덕은 재판정에서 회유당하지 않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7)


이런 상황에서 수감된 동료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들에게 성경책이며 사식 등을 제공하면서 이들의 의로운 행위를 응원했던 세브란스 의학교의 외국인 교수이자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였습니다.


그의 한국 이름은 석호필입니다. 석호필하면 미국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을 쉽게 떠올리겠지만, 스코필드라는 이름을 석호필로 처음 사용한 것은 바로 이 선교사입니다.


석호필(石虎弼)이라는 자신의 이름에는 단단하고(돌 석(石)) 무섭게(범 호(虎)) 남을 돕는다(도울 필(弼))는 자신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김마리아보다 3살 많았던 청년 석호필은 그 이름에 걸맞게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릴 정도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는 민족대표 중 한 사람에게 미국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한국에서도 모종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언질을 주어 3.1운동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나자 현장을 직접 카메라에 담아 상황을 기록하였고, 자신의 외국 국적을 이용하거나 일본 경무국장과의 친분을 도용하여 피해를 당한 학생들을 구해내기도 합니다.


또한 3.1운동 탄압 사건으로 유명한 제암리 학살 사건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일본 경찰을 따돌리고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촬영하여 일제의 잔혹상을 해외에 폭로한 인물이 바로 그였습니다. 석호필의 노력 때문에 해외는 물론 일본에서조차 제암리 학살을 질타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3.1운동에 대한 우호적인 국제 여론을 형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석호필은 일본인의 선행을 외국인에게 홍보하기 위한 어용 영자신문에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글을 무기명으로 자주 실었고, 이완용과의 만남에서 “어떻게 하면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소?”라는 질문을 받자 “이천만 국민에게 사죄해야 될 수 있소.”라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석호필은 조선 총독을 만나 고문 등을 삼갈 것을 요청하기도 하지만 그가 한국인을 돕는 사실이 밝혀지자 훗날 조선총독부는 그를 강제 출국시킵니다.


이후 한국을 잊지 못해 한국을 수차례 방문하다가 1969년 한국에 영구 정착하였고, 한국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래서 외국인 최초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사람이 바로 석호필입니다.8) 


석호필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처럼 민족운동을 했던 인물이기에 그의 업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더 오랫동안 알려지고 기억되어야 합니다.


3.1운동으로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될 당시 일제는 서양 선교사들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청년 석호필이 신문사에 일제의 만행을 지적하자 서양 선교사들의 감옥 면회가 가능해졌고, 이 때문에 김마리아 일행들도 석호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9)


선교사들의 아낌없는 지원은 면회로 끝나지 않았고, 다른 서양 선교사가 보석금을 지불한 덕분에 김마리아와 황에스터, 박인덕 등은 감옥 생활을 끝내고 함께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10) 


선교사들은 단순히 종교만 전하지 않았고, 단순히 면회만 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견딜 수 있도록 일제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항의하였고, 자신들의 돈을 아낌없이 사용했습니다. 이들의 전적인 헌신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김마리아 일행이 고통을 인내하기는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의로운 일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1)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64쪽
2) 양성숙, 「제6장 3ㆍ1운동기 서대문형무소 투옥실태」, 『민족사상』2, 한국민족사상학회, 2008.12, 183쪽
3) 양성숙, 「제6장 3ㆍ1운동기 서대문형무소 투옥실태」, 『민족사상』2, 한국민족사상학회, 2008.12, 184쪽
4)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69쪽
5)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81쪽
6)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70·177·180쪽
7)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82쪽
8) 「프랭크 스코필드」,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9)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80쪽
10)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80·182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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