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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결고리 Jan 07. 2024

청년 김마리아, #085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배신자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청년 시절 읽기


#085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재조직과 배신자 오현주의 밀고


김마리아는 석방되었지만 심문당할 때의 고문으로 몸이 많이 상했기 때문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치료에 집중해야 했지만, 김마리아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퇴원을 서둘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정신여학교로 돌아갑니다.


그녀는 감옥에서 석방된 지 겨우 3개월 만에 자신의 숙소에서 16명의 여성 지도자와 함께 여성 항일운동에 관한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 노력의 결과 침체에 빠진 국내 여성 통합 단체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입니다.1)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김마리아의 이러한 도전은 깊이 새겨볼 만합니다.


1920년대는 소비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이제 곧 여성의 단발이 유행할 것이고, 서양 영화가 상영되어 주인공의 옷차림을 따라 하게 되며, 화장품 판매가 급증할 뿐 아니라 백화점도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모던 걸이 등장하는 시대에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갖춘 사람들은 새로운 유행 좇기에 바쁜 상황이 연출됩니다.


3.1운동으로 한 때 독립의 희망을 갖기도 했으나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대부분 체포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거국적 독립 열기는 점차 사그라집니다.


게다가 새로 부임한 조선 총독은 문화통치를 내세우며 친일파 양성을 적극 추진합니다. 사람들은 일제강점기라는 부당한 현실을 잊고 물질주의에 편승하는 편이 훨씬 쉬웠을 것이기에 민족 변절자가 하나둘 늘어가기 시작합니다. 


반면 청년 김마리아의 신념은 확고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을 직접 몸으로 경험했으면서도 세상의 변화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민족 독립이라는 한 가지 목적만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녀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회장으로 선출된 후 자신의 조직 운영 역량을 적극 발휘합니다. 고작 활동 한 달 만에 회원 수를 2천여 명으로 증가시켜 침체되었던 단체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 개편합니다. 또한 하위 조직에는 기존에 없었던 적십자부와 결사부를 설치합니다. 이는 향후 임시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독립전쟁이 전개될 경우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김마리아는 하와이와 간도에까지 해외 지부를 설치했고, 국내외에서 모금된 거액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송부하기도 하였으니 김마리아가 재조직한 단체는 기존의 단체와는 그 규모와 성격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2)


그러나 이렇게 국내 여성 항일 단체가 재개하려는 감격적인 상황에서 김마리아는 다시 한 번 혹독한 위기를 맞닥뜨립니다. 그것은 바로 내부의 변절자 오현주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일제에 밀고한 것입니다.


오현주라는 인물의 인생을 살펴보면 가슴 아픈 점이 있습니다. 그녀는 김마리아와 함께 민족운동을 시작한 나혜석이나 박인덕처럼 3.1운동에 동참한 인물이었습니다.


김마리아보다 2살 어린 26세의 청년은 3.1운동 이후 투옥된 애국지사들이 곤란한 생계로 사식을 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의 언니 등과 함께 투옥된 애국지사들을 위한 구제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혈성단애국부인회입니다. 


오현주는 김마리아의 후배로서 정신여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단체는 주로 정신여학교 출신이 중심이 되었고, 지회를 설치하고 회비를 모으는 등 상당히 활발하게 운영되었습니다.


이후 임시정부는 여성 단체의 통합을 제안하게 되는데, 이때 최종적으로 결성된 단체가 바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였습니다. 그리고 회장에는 청년 오현주가 임명됩니다. 이렇게 민족운동에 헌신적이었던 오현주가 변절하다니, 너무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오현주의 남편 역시 상하이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의 열기가 식어가자 그는 귀국 후 아내에게 “여보, 독립 달성은 이제 물 건너간 일이 분명하오. 당신도 독립운동에서 빨리 손을 떼고 다시는 관여하지 마시오.”라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현주는 남편의 말을 따르게 되었고,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침체됩니다.


석방된 김마리아는 이런 상황을 모른 채 이 단체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모임을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단체를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회장이었던 오현주는 회장직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이 때문에 김마리아가 회장직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왜 회장직을 거부했을까요? 남편의 요구도 있었겠지만, 그 요구에서 더 나아가 이 단체를 곧 일제에 밀고할 예정이었기 때문입니다.3)


이제 단 한 명의 배신으로 단체는 와해되고 많은 여성 지도자들은 다시 견디기 어려운 고문과 감옥 생활을 겪게 됩니다. 격동의 시대에 배신자 한 명이 역사에 미치는 해악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오현주와 그녀의 남편은 독립운동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신변을 보호받기 위해 애국부인회를 밀고하였는데, 이때 그들이 협력했던 형사는 남편의 검도 선생이자 고등계 한인 형사였습니다. 오현주는 이 형사를 임시정부의 밀사로 거짓 소개하여 김마리아 일행과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그런데 오현주는 만남을 주선하기 전에 이미 애국부인회의 회칙과 명단 등의 서류를 형사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단체의 일원들이 체포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4)


김마리아가 출옥한 지 4개월, 애국부인회의 회장으로 취임한 지 1개월 만에 마침내 형사들은 그녀를 찾아옵니다. 수업 중이던 김마리아와 다른 교사들은 10여 명의 일본 경찰과 형사들에게 연행되었고, 그 자리에 있던 손진주 교장과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5)


오현주의 밀고로 체포된 애국부인회 임원 18명은 대구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런데 대구로 이송될 당시 오현주도 동행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모든 과정이 그녀의 밀고였다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대구에서의 심문과 고문에 앞서 이들은 다른 동지들의 희생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동지들의 이름이나 비밀을 절대 누설하지 않고, 애국부인회도 독립운동이 아니라 여자 교육 운동이라고 주장하자고 입을 맞춥니다. 물론, 이때 오현주는 이미 일본 경찰이 모두 알고 있는 것 같다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6) 


당시 김마리아는 이런 상황을 신앙으로 이겨내기 위해 유치장에서 동지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이때 한국인 친일 형사가 조용히 안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김마리아는 동지들을 대표해서 친일 형사를 다음과 같이 호되게 꾸짖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어느 나라 백성이오. 단군 자손이며 대한의 아들이거늘 어찌 당신 목숨만 부지하고자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새도 한쪽 날개를 잃으면 날지 못하는 법이거늘 어찌 나라를 잃고 주권을 잃은 사람이 우리들만이오. 한국 민족 이천만 중 그 절반은 여성인데 남자들의 독립투쟁에 합세해 궐기한 여자들의 용감한 정신력을 위로는 못 해 줄망정 도리어 박해를 가하는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이오. 도대체 당신은 대한인 정신이 있소. 사내의 낯가죽을 쓴 당신이 우리 여자들 앞에서 감히 얼굴을 들 면목이 있소.”7)


이 말에 친일 형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갔습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오현주도 아마 뜨끔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심문이 시작되었고, 오현주가 제일 먼저 불려 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오현주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석방되기로 약속된 그녀가 다시 돌아올 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현주가 끌려간 지 10일 정도 지나자 이제 남은 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심문과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시작됩니다.8)


 

1)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91·194쪽
2) 황민호, 「김마리아의 국내에서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9,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9, 104쪽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95·213쪽
3)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84-185·188-189·190·195쪽
4)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14-217쪽
5)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17-218쪽
6)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22·224쪽
7)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25쪽
8)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25-226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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