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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결고리 Jan 13. 2024

청년 김마리아, #087 최종 판결과 중국 망명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청년 시절 읽기


#087 최종 판결과 중국 망명


1920년 5월 병보석으로 풀려난 지 1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그동안 서울의 병원에서 당대 최고의 의료진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김마리아의 병세가 완전히 호전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콧속에 심지를 박아 고름을 뽑아내는 수술을 했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고름이 고였기 때문에 여러 번 재수술을 받아야 했으나 약해진 몸 상태 때문에 수술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정신쇠약과 심한 두통으로 인한 구토증, 몸의 왼쪽 절반을 쓸 수 없는 반신불수증을 겪었고, 정상적인 식사가 어려워 겨우 죽을 먹으며 버텼습니다.


지난 일 년의 기간은 자신의 병만 돌보기에도 버거운 시간이었지만 김마리아는 애국부인회의 회장으로서 일제와 재판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건강 상태에도 불구하고 재판정에 직접 나가 발언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복심법원(일제강점기 2심 재판소)의 판결을 인정하고 복역한 동료들과 달리 일제의 판결에 불복하여 끝까지 상고하면서 싸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내가 아무리 죽게 된다 할지라도 내가 법정에 나가지 못하여 만일 나의 동지들로 하여금 불이익한 영향을 미치게 한다면 안 된다.”는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


1920년 6월 7일에 열린 대구지방법원 1회 공판을 시작으로, 1920년 12월 27일 복심법원 판결언도, 1921년 6월 20일 징역 3년의 경성고등법원 최종 판결언도가 나기까지 김마리아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견뎠습니다. 하지만 김마리아는 최종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고, 건강이 회복되면 바로 죽음의 감옥행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여성 독립운동을 재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청년 김마리아는 고심 끝에 또다시 인생의 중요한 도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2)


김마리아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망명하게 된 걸까요? 여기에는 선교사 매큔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선교사 석호필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적극 도운 선교사입니다. 그는 신민회를 해산한 105인 사건 당시 재판정에 섰고, 3.1운동 때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을 자기 집에 숨겨 준 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일본 관헌의 가택 수색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애국지사와 그 가족들을 도왔고, 독립운동을 위해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제자를 면회하여 사형 영결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잠시 미국에 돌아간 매큔은 다시 한반도로 돌아와 숭실학교 교장에 취임하였고, 학교가 폐쇄당할 때까지 일제의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훗날 김마리아가 미국으로 다시 망명할 당시 아버지와 같은 후견인이 되어 준 인물도 바로 매큔이었습니다.3)


매큔은 자신의 회고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김마리아만은 일제의 손에 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하나님께 많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김마리아를 어떻게 해서라도 살려야 조선의 독립운동은 죽지 않고 어느 시기에 가서라도 꼭 조선독립이 될 것이라 믿음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김마리아를 중국으로 건너보냈습니다. 김마리아는 조선의 딸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진정한 딸입니다.4)


이러한 인식 때문에 매큔은 위험을 감수하고 김마리아의 망명을 주선하고, 거액의 망명 비용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매큔은 병실에 있는 김마리아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중국 교통 길을 잘 아는 믿을 만한 청년이 있으니 그의 힘을 빌려 중국으로 망명하라고 간곡히 권고하는데, 그 청년은 임시정부 요원이었던 매큔의 제자였습니다. 임시정부에서도 여성 지도자로서 청년 김마리아의 위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구출하는 것은 시급하고 중대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매큔의 제자를 파견하였던 것입니다.5) 아마 매큔과 임시정부의 헌신적인 지원과 관심이 없었다면 청년 김마리아는 더 이상의 독립운동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김마리아는 망명 제안을 처음부터 선뜻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고, 여기에 동지들의 운명이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개월에 걸친 설득 끝에 김마리아는 드디어 망명을 결정합니다.


망명을 결행한 날은 6월 29일, 최종 판결언도가 나온 지 9일이 지난 날이었습니다. 요양 치료를 위해 병원에서 퇴원한 그녀는 자신이 빌린 성북리의 한 농가로 돌아온 후, 다음 날 새벽에 인력거를 타고 인천으로 떠납니다. 도중에 중국인 요리점에서 중국 의복으로 변장하고 다시 자동차로 제물포에 도착한 그녀는 어느 중국인 교회 대강당에서 일주일간 자취를 감춘 후 드디어 중국으로 떠나는 배에 오릅니다. 그리고 약 2주일여를 보내고 7월 21일 중국 웨이하이에 도착합니다.6)


김마리아가 탈출에 성공하자 당황한 일제는 1921년 8월 1일부로그녀를 감옥에 가두려는 입옥 명령을 내리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미 망명에 성공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던 상황이었고, 국내 언론은 이를 인천중대사건’으로 명명하여 보도하기도 했습니다.7)


김마리아는 망명 준비 단계에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배에서는 약한 몸 상태와 심한 뱃멀미로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중국 웨이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하기까지는 다시 3주가량의 시간이 더 소요됩니다.8)


결과만 볼 때 망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간신히 중국에 도착한 청년 자신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먼저는 안도하는 마음이었겠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앞으로의 상황을 낙관만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외형상 실패를 경험하고 도망쳐 왔다는 생각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역경에 물러서지 않았고, 청년은 다시 도전을 이어갑니다.



1)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64-265쪽
2)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71-272쪽
3)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74-275쪽
4)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76쪽
5)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74·280-281쪽
황민호, 「김마리아의 국내에서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9,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9, 119쪽 
6)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81-283·286쪽
7) 황민호, 「김마리아의 국내에서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9,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9, 119쪽 
8)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86-287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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