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결고리 Jan 20. 2024

청년 김마리아, #089 김마리아의 역사가 주는 의미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생각해 보기


#089 청년 김마리아의 역사가 주는 의미


○ 지금 시대에 필요한 여성상은 무엇일까요?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신사임당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굳이 누가 그러한 여성상을 규정했는지 따지지 않더라도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가부장적 인식이 지금도 일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물의 업적을 기리는 과정에서 정치적 의도가 반영되었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판단이었는지 따져보아야 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다음 세대를 위해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지금 시대에 필요한 여성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여성의 업적이 발굴되어야 하고, 공유되어야 합니다. 이 일에 청년 여러분의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일제강점기 극소수의 엘리트 여성은 신여성, 모던걸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의 열기는 점차 사라지고, 물질주의적 소비문화가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마리아·황에스터·차경신·김순애처럼 끝까지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거나, 나혜석처럼 일제강점기의 문제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경력을 위해 힘쓰거나, 박인덕처럼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로 변절하거나, 오현주처럼 동료를 배신하는 적극적인 변절의 길을 간 사람이 있습니다.


선택은 청년 각자의 몫입니다. 하지만 만약 청년으로서 사회적 주목을 끄는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면 어떤 유혹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국에는 ‘의로움’을 선택할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 의로움에 불붙은 청년은 민족이 처한 현실에 분노할 줄 알고, 저항 운동의 선봉에 설 줄 알며, 가장 먼저 희생해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청년들은 그런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당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중도에 포기한 채 귀국하여 독립운동의 열기를 전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개인의 영달’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잃게 될지 고민하지 않았고, 앞으로 받을 혹독한 탄압을 먼저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당돌했고, 무모했지만 그 열정이 3.1운동의 불을 붙였고, 국제적 여론을 집중시키며 시대를 변화시켰습니다.


의로움으로 연대한 청년들의 힘이 지금 이 시대에도 발휘되기를 희망합니다.



○ 민족 지도자에게 필요한 역량 중 하나는 의로움을 품은 세력들과 연대할 수 있는 열린 태도입니다. 3.1운동의 민족대표들은 청년들에 대한 불신으로 그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각 세력들은 서로의 의견을 배척하고 결국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후 나타난 독립운동단체들도 만들어졌다 사라지고, 서로 연합했다 갈라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떤 연대를 이루어내더라도 일제의 폭력 앞에 역부족일 시기에 분열을 보여준 민족 지도자들의 태도는 반성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는 청년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거센 저항 때문에 역사는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청년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고, 훗날 그런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 다른 세대와 연대할 수 있는 ‘열린 태도’의 교훈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종교에 거는 사회적 기대는 어느 정도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식민지에 불과한 외딴 나라에 교육 사업을 시작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해주며, 자신들의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했을 뿐 아니라 일제 치하의 불의한 상황을 해외에 알리면서 신사참배에 저항했던 선교사들의 진실한 행위는 종교에 대한 사회적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종교의 참모습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한국은 선교사를 받던 나라에서 약 170개국에 2만 명의 선교사를 파견할 정도로 많은 선교사를 파견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1) 하지만 이들 중 일부는 자녀의 교육이나 자신의 스펙을 위해 떠나는 사람도 있고, 현지인 봉사가 아닌 해외에 있는 한국인 봉사를 위한 선교를 선호하기도 합니다. 더 좋은 조건을 비교하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의 선교지를 준비하다가 유럽에 자국민 봉사를 위한 좋은 조건의 선교 자리가 나면 고민 없이 떠나기도 하고, 그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국내 상황도 비슷합니다. 지방 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했더라도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떠나는 바람에 지도자를 다시 청빙하는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도사도 마찬가지인데, 한 기사에서는 청년 신학생들이 지방 벽촌보다는 도시의 사역지를 희망하여 지방의 중소교회에서 교육전도사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이지만, 대형교회의 경우는 경쟁이 치열하다고 지적합니다.2) 


물론 전체가 아닌 일부의 사례입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어려운 상황을 인내하며 말없이 숭고한 봉사를 이어온 대다수의 헌신적인 청년 사역자를 힘 빠지게 합니다.


과거 수많은 청년 선배들은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을 순수한 열정으로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청년 종교인이라면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배들의 본을 따라 도전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사참배에 굴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종교인을 오히려 앞장서서 탄압했던 일제강점기의 종교 지도부처럼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청년 종교인이 되고자 한다면 손진주·석호필·매큔의 희생을 반드시 기억하기 바랍니다.


 

○ 지금의 청년 교사는 어떤 교사상을 추구해야 할까요? 먼저는 끊임없이 학업에 도전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그녀는 망명 상황에서도 학업을 놓지 않았고, 그러한 열정은 그녀의 일생에서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이런 태도야말로 교육자의 참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불의에 도전하는 태도입니다. 그녀는 민족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했습니다.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고, 신념을 세우기 위해 학교 골방에서 기도했으며, 학생들과 함께 옳은 길을 고민했고, 동료들과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가 박탈될 것을 알고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탄압받아 교사의 지위를 잃었습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그녀의 열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것은 개인의 출세가 아닌 공동체를 향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 곁에는 지키고 싶은 가족이 있었고, 학교 동기들이 있었고, 유학생이 있었고, 가르쳐야 할 학생이 있었고, 교사 동료가 있었고, 후원자들이 있었고,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고, 민족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그녀에게는 인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에 해코지하는 불의를 청년 교사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두 번씩이나 고통에 빠뜨린 일제 치하의 한반도에 교육자의 신분으로 다시 돌아올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훌륭한 역량으로 지식을 잘 전수하여 존경받는 교사가 되는 것은 교사로서 가장 기본적인 자질입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닫고 불의에 도전할 수 있는 올바름’이 교사에게 더욱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청년 교사가 추구해야 할 교사상이 아닐까요?




○ 오현주의 변절은 여성 지도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녀의 행위는 여성 항일운동단체를 와해시켰고, 가족을 포함한 동료들을 혹독한 고문에 빠뜨렸습니다. 민족운동의 기운을 꺾은 오현주의 행위는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민족을 배신하게끔 부추긴 일제조차도 오현주의 변절을 ‘사람이 아닌 행동’으로 평가했습니다. 이것은 ‘변절’이 같은 악인들의 집단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행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깐의 이익을 위해 일본인뿐 아니라 당대와 후대의 민족으로부터 오래도록 반민족행위자로 기억되는 배신행위는 하지 맙시다. 그래서 온전히 ‘사람’으로 평가받는 청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일제의 탄압으로 3.1운동의 열기가 가라앉고, 변절자의 밀고로 여성항일조직이 와해되며, 혹독한 고문으로 독립운동 활동이 멈추게 되는 것처럼,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마주할 때 청년의 열정은 언제든지 식을 수 있습니다. 


그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고, 지나온 시간이 후회될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것은 청년이 도전 과정에서 겪는 자연스러운 경험입니다. 


청년도 사람인데 항상 열정이 넘칠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당하지 못할 역경이라면 김마리아가 망명하듯 상황을 피해야 하고, 열정이 회복될 때까지 쉼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도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김마리아에게 왜 바로 독립운동을 이어가지 않느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았습니다. 지친 청년이라면 쉼과 위로가 필요하고, 받은 상처가 상처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그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에 집중해야 합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내내 이어졌고, 여성 항일조직은 꾸준히 조직되었으며, 김마리아는 다시 독립운동을 재개했습니다. 


신념이 남아 있다면 회복 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도전 중에 겪은 상처가 청년의 신념을 꺾지 않도록 쉼과 위로를 경험하는 청년이 되기 바랍니다. 



○ 김마리아는 혼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자로서 후학을 양성했고,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청년들의 ‘연대’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모두가 김마리아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김마리아의 제안을 받아 독립운동에 함께 뛰어든 차경신이 있고, 전국적인 조직에 참여하여 아낌없이 후원했던 회원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변화를 제안하는 김마리아가 될 수 없다면, 그 제안을 수용하는 청년이 됩시다. 그런 청년들이 많아진다면 그 세력은 언젠가 세상을 더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 「한국선교현황도표」, 한국선교연구원(krim.org), 2020년말 기준
2) 신상목, 「지방 교회에 ‘교육 전도사’가 없다」, 국민일보, 2016.4.1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이전 21화 청년 김마리아, #088 임시정부 분열, 미국 망명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