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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결고리 Jan 08. 2024

청년 김마리아, #086 두 번째 고문, 보석 석방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청년 시절 읽기


#086 두 번째 고문, 보석 석방


애국부인회 회장이었던 김마리아는 다른 동지들과 다르게 중범죄자로 다루어져 홀로 독방에서 병고와 외로움을 견디게 됩니다. 이때 김마리아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앞으로 그녀를 거칠게 다룰 인물이 3.1운동으로 체포될 당시 김마리아를 심문하고 고문했던 바로 그 일본 검사였다는 점입니다.


일본 검사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이 일어나자 자신이 직접 그 일을 맡겠다고 자원하여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옵니다. 일본 검사는 그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김마리아가 겪을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모욕의 강도가 이전보다 훨씬 심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김마리아는 이미 그때의 고문으로 코와 귀에 고름이 차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고 건강이 회복되기도 전에 다시 수감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김마리아의 건강 상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 검사는 또다시 목과 얼굴에 무차별적인 폭행과 고문을 가했습니다.


다른 동지들의 상태도 위독했지만, 김마리아는 코와 귀의 염증이 심해 열이 높았고 머리를 심하게 구타당한 고문으로 마침내 극도의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닙니다. 김마리아가 겪은 가장 끔찍한 고통은 성고문이었습니다. 김마리아는 훗날 몇 번의 청혼을 받은 바가 있으나 이를 모두 완강히 거절했는데, 김마리아의 한 후배에 의하면 독립운동을 위해 조국과 결혼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의 성고문 때문이기도 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한 사회주의 운동가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김마리아 3.1운동 때 애국부인회 회장 아니여? 그리고 세상의 악형을 다 받아 미쳤어. 그런 마리아여. 그런데 마리아가 왜놈한테 악형을 어떻게 당했던지. 다들 입으로 말이 많은디. 그 말을 내가 안 하느디. 그럴 것 없다. 왜놈한테 이제 나 말해 버리고 형을 안 당할란다. 결심을 했대. 그렇게 말해 버릴라고. 아 그랬는디 여자를 데려다가 이놈들이 음부에다 불 달궈 가지고 화침질을. 아! 데려다 여기다 화침질을. 이러구서 이렇게 문대면 이것이 뱃겨질 거 아니여? 그것은 군산서도 그랬네. 왜놈들이. 그런디 종로경찰서에서 음부에다 화침짐을 했네. 헌 것을 보고서는 그냥 혼절을 했어. 마리아가. 아주 그냥 머리를 때리고 터지는 소리를 지르고 그냥 욕을 하구. 미쳐 버렸어. 영영 참말로 미쳤어. 왜놈들이 치료할라다 못한 게 나가서 치료하고 오니라 하는데 미쳐 버렸어.1) 


여성의 몸으로 청년 김마리아가 이겨내기에는 너무 가혹한 고문이었습니다. 그 고통의 한이 한평생 사무쳤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 속에서 김마리아를 더욱 정말에 빠뜨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정신적 충격은 밀고자가 바로 자신의 후배이자 자신이 믿었던 오현주였다는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요? 3.1운동 당시 자신을 심문했으며 대구까지 내려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일본 검사가 심문 과정에서 직접 오현주의 변절로 애국부인회의 전모가 밝혀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현주는 3천 원의 거금을 받고 정보 일체를 넘겨주었는데, 일본 검사의 입에서도 오현주는 “사람이 아니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오현주는 당시 민족운동을 함께 했던 자신의 친언니도 팔아넘길 만큼 죄질이 좋지 않았습니다.


고문 속에서도 피해가 더 확산되지 않도록 힘겹게 지키고자 했던 단체의 비밀이 오현주에 의해 너무 쉽게 폭로되었다는 사실을 그것도 일본 검사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 김마리아는 얼마나 큰 좌절감과 배신감을 느꼈을까요? 아마도 김마리아는 그동안 오현주와 함께 했던 시간들과 오현주의 행동 하나하나를 곱씹어보며 견디기 어려운 다양함 감정과 마주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같은 민족을 배반한 사실 때문에 일제로부터 비웃음을 사게 된 상황은 정신적으로 더욱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짊어져야 했던 고통의 무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마리아는 희망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너무나 다행히도 오현주는 배신했지만, 민중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애국부인회 임원들이 투옥된 상황에 깊이 애통해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전국에서 동정금을 보내왔고, 어떤 사람들은 대구에 집 한 채를 얻은 후 돌아가면서 감옥에 사식을 만들어 보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와 같은 민중의 정의로움을 믿었을 것이고, 이것이 본질적으로는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이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된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석호필 역시 애국부인회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대구로 내려갔는데, 면회가 불가한 상황이었지만 총독부 정무총감의 명함을 이용하여 그녀들과 면회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서울로 돌아와서 조선총독에게 고문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수감자 처우 개선을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선교사들은 직접 대구로 내려오기도 하고, 여러 번 보석 청원을 해보기도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해를 넘긴 1920년 5월. 고문으로 김마리아의 건강이 더욱 악화되자 그녀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일제는 외부인과의 접촉 금지를 조건으로 보석 석방을 허용하게 됩니다.2)


김마리아는 자신이 처한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재판을 이어갔으며, 처음 동지들과 다짐한 것처럼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독립운동이 목적이 아니라 여자교육을 목적으로 한 것이고, 오현주가 주관한 애국부인회를 이어받아 활동한 것이 아니라 여자교육의 목적을 가지고 새로 조직하여 활동한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3) 이것은 실로 대단한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석 석방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김마리아의 병은 더 악화되었고 결국 서울로 옮겨 와 코와 귀의 고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고문 후유증 때문에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보통 병실에 입원할 수 없을 만큼 김마리아의 병세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은 다시 다음해로 이어져 김마리아는 30세가 됩니다.4)


1)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27-228쪽
2)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35-236·239쪽
3)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55쪽
4)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62·271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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