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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결고리 Jan 20. 2024

청년 김마리아, #088 임시정부 분열, 미국 망명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청년 시절 읽기


#088 임시정부의 분열, 실망한 청년, 미국 망명


김마리아가 상하이에 도착하고도 무려 3개월이 지난 후에 환영회를 개최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건강이 얼마나 회복되기 어려웠는지를 보여줍니다.1) 


상처 입고 지친 청년에게는 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해가 되기까지 김마리아는 건강을 회복하며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한 시간을 가집니다. 아마도 그 기간에 2.8독립선언에서 망명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돌아봤을 것이고, 좀 더 차분한 상황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되짚어보며 성장의 기회로 삼았을 것입니다. 


1922년, 건강이 회복된 31세의 김마리아는 고통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신념을 다시 실천합니다. 그녀는 실력을 쌓기 위해 먼저 난징에 있는 금릉대학에 입학하여 중국어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는데, 이는 여성의원으로서는 최초였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난징에 유학하고 있던 40여 명의 한국인 여자 유학생들과 단체를 조직합니다. 단체의 회장은 김마리아였고, 이를 통해 여성운동과 항일운동을 추진합니다.2)


생사의 위기는 여성독립운동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 상황을 한 편의 영화로 그린다면, 이다음은 아마도 주인공이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여 일제를 곤경에 빠뜨리는 장면이 될 것이라고 상상할 것입니다. 하지만, 청년이 마주한 현실은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았습니다. 청년이 앞으로 마주할 문제는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아니 광복 이후에도 계속 반복되는 기성세대의 문제였기 때문에 청년은 무기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청년을 절망에 빠뜨린 문제란 바로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이었습니다. 독립이라는 숭고한 목표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이었지만, 주관이 뚜렷해지고 욕심이 커질수록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런 태도는 세상에 대해 더 알수록, 다시 말해 나이가 들수록 더 커지는 듯합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단체에 들어 온 청년이 단체의 활동 방향 때문에 서로 패를 갈라 대립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것이 임시정부에 발을 들인 청년 김마리아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김마리아가 상하이에 도착할 당시는 임시정부가 구성된 지 겨우 2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이때 독립운동 세력은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처음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와는 달리 혈연·지연·학연 그리고 사상적 대립과 주의·주장 등으로 인해 모순과 갈등이 극에 달했습니다.3)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마리아는 비록 의정원 의원이었지만 상하이에서 실제적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주로 난징에서 활동했던 것입니다.4)


임시정부 내의 갈등은 심각했지만, 대통령 이승만은 상하이가 아닌 워싱턴에 주로 머물렀습니다. 당시는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하던 임시정부의 비밀조직이 일제에 발각되어 임시정부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 패배했던 일제가 보복으로 간도참변을 일으켜 간도지역의 한국인을 대량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자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장하는 급진론과 기존의 실력준비론이 대립하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대립이 심화됩니다.5)


하지만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에서 공채 발행을 통해 미주지역의 재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미국에서 임시정부를 원격조종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승만 세력이 임시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 의존한 외교독립론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1921년에 개최된 워싱턴 회의에서 무참히 깨집니다. 워싱턴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군축 문제 등을 다룬 국제회의였는데, 여기서 임시정부는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지만 강대국들은 애초에 한국의 독립문제는 안중에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이승만 이미 국제연맹에 한국을 위임통치해 줄 것을 청원한 사건으로 홍역을 앓았는데, 워싱턴회의에서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자 이승만의 공신력은 크게 실추되고, 임시정부 내의 대립은 더욱 극심해 집니다. 그래서 임시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킨 후 임시정부의 내부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게 됩니다.6)


1923년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약 5개월 동안 135개의 지역 및 단체 대표 125명이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을 두고 협의한 거국적 회의였습니다.7) 하지만 정치적 노선은 이미 심각하게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의견의 합치는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개혁해야 한다는 개조파의 대립은 청년 독립운동가들에게 참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김마리아는 국민대표회의 개막연설을 하며 이들의 분열을 막기 위해 적극 참여하였으나 그녀의 기대와는 다르게 국민대표회의는 최종적으로 결렬되고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후 임시정부는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고, 그녀는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32세의 청년 김마리아는 국민대표회의 결렬 직후, 고작 망명 성공 2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며 청년의 시절을 마무리합니다.8)


청년의 시절 가부장적인 시대 상황과 일제강점기의 억압 속에 줄곧 여성 민족운동에 온 열정을 다하고, 3번의 체포와 2번의 극심한 고문, 거기에 배신의 아픔까지 겪었으며, 생을 이어가고자 어렵게 망명에 성공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의 계파 분열에 또 한 번 참담한 심정을 느껴 다시 새로운 곳으로 망명을 떠난 청년의 생애를 고려할 때, ‘청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청년의 도전은 미완성으로 끝났다’는 것을 다시 증명합니다.


청년은 2.8독립선언 활동으로 일본에서 처음 체포될 당시 자신 앞에 이런 엄청난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청년은 반복되는 절망과 시대적 한계에 굴복하지 않았고, 끝까지 도전했습니다. 이것이 청년의 열정이자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장년이 된 김마리아는 감히 일제 치하의 한반도에 다시 발을 들이는 용기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민족공동체를 향한 김마리아의 한결같은 신념에 경의를 표하며, 40대가 된 그녀가 귀국 후 기자와 나눈 인터뷰를 끝으로 김마리아의 글을 마무리합니다.


기자: 조선이 그리우셨지요?

김마리아: 그럼요. 늘 고국으로 나오고 싶은 마음으로 꽉 찼었지요. 조선을 나오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모양으로 지내겠다고 공상으로 꽉 찬 생활을 했습니다.


<1932년 8월 2일 인터뷰>9)


1)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91쪽
2) 정경환, 「제4장 김마리아의 구구투쟁과 독립정신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7, 한국민족사상학회, 2013.12, 115-116쪽
전병무, 「[독립운동가 열전] 김마리아, 기독교계 항일여성운동의 대모」, 『내일을 여는 역사』 7172,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2018.9, 142쪽
3) 정경환, 「제4장 김마리아의 구구투쟁과 독립정신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7, 한국민족사상학회, 2013.12, 115쪽
4)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93쪽
5)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 6, 인물과 사상사, 2008, 282쪽
6)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 6, 인물과 사상사, 2008, 281쪽
이택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이승만 탄핵 재검토」, 『세계지역연구논총』 37, 한국세계지역학회, 2019, 42-44쪽
7) 이택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이승만 탄핵 재검토」, 『세계지역연구논총』 37, 한국세계지역학회, 2019, 44쪽 
8)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98쪽
9) 정경환, 「제4장 김마리아의 구구투쟁과 독립정신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7, 한국민족사상학회, 2013.12, 116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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