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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결고리 Jan 04. 2024

청년 김마리아, #083 3.1운동 직후 여성독립운동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청년 시절 읽기


#083 3.1운동 직후 여성 독립 운동 논의


3.1운동은 여성 민족 운동의 관점에서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3.1운동에 참여한 한국 여성들은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분명히 표명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동원하여 저항했기 때문입니다.1) 


훗날 인도의 초대 수상 네루는 영국의 식민지 시절 감옥에서 자신의 딸에게 쓴 편지 『세계사 편력』에서 “한국의 독립투쟁 가운데 중요한 것은 1919년의 독립 만세 운동인데, 젊은 여대생이 그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사실은 너에게도 흥미로울 것이다.”라고 언급했습니다.2) 이렇게 한국 여성들의 독립 활동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김마리아에게는 차경신말고도 도쿄에서 함께 유학했던 친구 황에스터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본 유학 전부터 송죽회라는 평양의 여성 항일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해외 독립단체에 군자금을 송금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황에스터 역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여성 대표를 파견할 임무를 띠고 몰래 입국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황에스터는 김마리아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둘은 항일 여성단체 조직에 바로 착수하면서 그 근거지를 이화학당으로 삼게 됩니다. 그 이유는 황에스터가 이화학당 출신이기도 하고, 이화학당 출신 중에 고급 여성 인력이 많았기 때문입니다.3)


3월 2일. 김마리아와 황에스터는 이화학당 출신이자 도쿄에서 함께 유학했던 나혜석과 함께 예배를 드린 후, 다른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 이화학당 교사 박인덕의 집을 찾았습니다.


김마리아보다 4살 어린 나혜석은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실력 있는 화가였고, 훗날 자신의 결혼과 이혼 과정으로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일본 유학 시절 김마리아와 함께 친목회 활동을 했고, 귀국 후 3.1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모순된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하고, 친일파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남편과 유럽 여행 중 남편의 친구이자 3.1운동의 민족대표이며 훗날 친일로 변절하게 되는 최린과 불륜 관계를 갖게 되어 이혼당하는데, 이후 나혜석은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려면 남성 자신부터 정조를 지키라고 하거나 정조의 문제는 남이 강요할 수 없는 주체의 자유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여 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 때문에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들으면서 자식을 보지 못하는 고통 속에 불교에 귀의합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인물이 나혜석입니다.4)


김마리아보다 5살 어린 박인덕은 3.1운동 당시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고, 제자였던 유관순의 순국을 목격한 인물입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으로 투옥되고, 미국에 가서는 김마리아와 함께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설립하는 등 꾸준히 독립운동을 했던 여성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에서는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황인종에 대한 혐오감이 증폭되었고, 박인덕은 일본인으로 오해를 받아 모욕과 혐오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귀국한 박인덕은 역에서부터 일장기와 일본 군인들이 범람하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의 두 딸이 일상생활에서 한국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녀는 민족을 위한 큰 뜻을 품고 농촌에서 계몽 활동을 펼쳤으나 미국 선교부의 지원은 점점 어려워졌고, 일제에 의한 감시로 활동은 중단됩니다. 당시 박인덕은 일본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생활은 불가능했고, 직업도, 남편도, 돈도 없는 상황에서 부양해야 할 어머니와 두 딸이 있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박인덕은 결국 일본어 강습회에 등록하게 되고, 이를 시작으로 친일의 길에 들어서, 다수의 친일 관련 글과 강연으로 결국은 반민족행위자가 됩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대학을 설립하는 등 교육 활동에 전념하다가 1980년에 생을 마감합니다.5)


28세의 김마리아·차경신·황에스터, 24세의 나혜석, 23세의 박인덕 등 당대 주목받던 20대의 청년 여성 지식인들이 3.1운동의 영향으로 한자리에 모였을 때 그들에게는 가슴 벅찬 감동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그들의 마음속에는 민족 운동이라는 하나의 열정만 불타올랐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한계 속에서 그들은 약자로서의 여성의 삶을 살았고, 각자 다른 인생을 걷게 됩니다. 개인이 감당하기에 벅찬 시대 구조 속에서 어떤 이는 처음부터 이익을 좇아 변절하고, 어떤 이는 견디다 변절하고, 또 어떤 이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변절하지만, 김마리아처럼 앞으로 찾아올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신념을 지킨 여성이 있다는 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박인덕의 집에 모인 이들에게 김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제는 조선의 독립운동이 시작된 날입니다. 남학생들이 크게 운동하고 있으므로 우리 여자들도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여학생들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6)



이렇게 여성운동에 관한 의견이 제안되고, 김마리아·황에스터·나혜석·박인덕 4인은 간사가 되어 여성단체 결성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를 이어갑니다. 그러던 중 3월 5일 학생들의 만세 운동이 서울역 광장에서 다시 일어나자 일제는 시위대를 탄압하였고, 이때 많은 여학생들이 체포되어 성폭력을 포함한 모욕적인 고문과 잔혹한 심문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3월 6일, 마침내 청년 김마리아에게도 위기가 찾아옵니다.7)



1) 정경환, 「제4장 김마리아의 구구투쟁과 독립정신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7, 한국민족사상학회, 2013.12, 107쪽
2) 이광수, 「[팩트체크] '인도 독립운동이 3.1운동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주장은 거짓」, 뉴스톱, 2019.3.1 
3) 「황에스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59쪽
4) 「나혜석」, 『문화원형백과 신여성문화』, 한국콘텐츠진흥원, 2004, 네이버 지식백과
「나혜석」,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5) 김지화, 『김활란과 박인덕을 중심으로 본 일제 시대 기독교 여성 지식인의 ‘친일적’ 맥락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6, 93-35쪽
6)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60쪽
7)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61-164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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