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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결고리 Jul 29. 2023

청년 김마리아, #081 민족대표들의 민중불신과 청년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청년 시절 읽기


#081 3.1운동 민족대표들의 민중 불신과 청년


2.8독립선언과 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기성세대는 청년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거나 그들의 행동을 불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3.1운동의 민족대표들도 그랬습니다.


이들 중에는 30대가 일부 있었지만, 절반가량이 50대가 넘는 장년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이 몰락해가는 시기부터 일제의 무단통치까지를 직접 보고 겪은 사람들이며, 그들이 목격한 것에는 동학농민운동이나 항일 의병과 같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민중의 무력 저항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종교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3.1운동 당시 무력 투쟁과 같은 과격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간디의 비폭력 운동이 칭송을 받은 것처럼, 이들이 생각했던 비폭력 저항을 소극적인 저항이라고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이들이 그동안 겪었던 일제 통치 상황을 고려할 때 젊은 청년들의 격렬한 저항은 청년들이 예상하지 못한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민족대표들은 무력 충돌을 우려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서로 다른 연령, 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사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온건한 방법이 아니고는 독립 운동 방안을 통일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민족대표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해도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민족대표라는 이름에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고문으로 순국한 사람이 1명이 있지만, 보통은 3년 이내의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선언서 제작에 관여하지 않고 태화관 집회에도 참여하지 않은 이유로 무죄를 받은 사람이 있었고, 이후 민족을 배신하여 민족대표라는 이름을 더럽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농민은 15년간 감옥 생활을 해야 했고1), 유관순과 같이 만세 운동 중 일제의 탄압에 의해 목숨을 잃은 민중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지도자의 무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대표들의 가장 큰 문제는 민중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2) 민족대표들은 학생 다수가 소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거사가 있기 바로 전날 밤에 독립선언식 장소를 종로의 탑골공원에서 종로 인사동의 고급 요릿집인 태화관으로 옮깁니다. 



3.1운동은 민족대표만 참여하기로 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학생 대표단과 연합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고, 학생 대표단은 학생들을 탑골공원에 소집시켜 독립선언서를 배부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족대표들이 학생 대표에게 거사 장소 변경을 알린 것은 거사 전날 밤 11시였습니다. 독립선언서는 이미 배포되기 시작했고, 학생 대표단들도 모든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지만, 민족대표들은 애초에 독립선언을 낭독하자마자 일제에 체포될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민중이 전혀 없는 요릿집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3)



거사당일 학생 대표가 찾아와 이렇게 거짓말하는 것이 어디 있냐며, 민족대표 중 한두 사람이 탑골공원에 와서 독립선언서를 다른 곳에서 발표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민족대표는 소란한 곳에서 하는 것이 선언이 아니고, 선언서를 모든 사람에게 배부하면 그것이 곧 선언이 되는 것이니 굳이 공원에 갈 필요는 없다고 대답합니다. 학생들이 이들을 찾아와 권총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협박을 하기까지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결국 태화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참석자들의 진술이 엇갈리긴 하지만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일본 경찰에 자발적으로 체포하기로 계획했기 때문에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인력거꾼을 통해 종로경찰서에 전달합니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합니다. 당시 탑골공원에서 초조하게 민족대표를 기다렸던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이 태연하게 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들의 식사는 ‘독립선언서를 통해 독립의 의지를 밝히려는 자신들의 처음 목적’을 달성했다는 의미의 기념 축하연이었을 것이지만4), 3.1운동을 함께 하려던 학생들은 학생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대내외적으로 독립 의지를 밝히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독립운동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훗날 임시정부 내에서도 독립운동 노선의 갈등이 있게 된 것도 큰 성과가 없었던 외교 활동에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민족대표는 식사 후 계획된 일정을 마친 다음 경찰에 연행됩니다. 그리고 일제의 취조 과정에서 민족대표들은 “천박한 학생과 군중이 모였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무식한 자가 불온한 일을 할지 알지 못하여” 독립선언서 발표 장소를 옮겼다고 답변합니다. 



그러자 이미 전국에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는데 폭동을 예상하지 못했느냐는 일제의 추궁에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 줄로 생각했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답변을 합니다.5) 



물론 이런 말은 일제의 취조 과정에 나온 말이기도 하고, 부당한 폭력 앞에서는 당당히 형을 받기보다 지혜로운 방법으로 변명하여 무죄를 받고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김마리아도 훗날 체포되어 취조당할 때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3.1운동 과정에서 민족대표들이 민중을 불신했던 태도를 고려할 때, 그들이 취조과정에서 했던 답변은 그들의 진심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민족대표의 노력을 무조건 폄하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언급했듯이 이들 중 3.1운동으로 체포되어 고문 중 순국한 인물이 있으며, 일부 친일 변절자가 있지만 대부분은 어려운 상황에서 끝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3.1운동을 위한 종교의 단합은 어려웠을 것이며 독립선언서의 전국적인 배부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거사 이전에 위기도 있었는데 독립선언서가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친일 형사에게 발각된 것입니다. 이때 민족대표는 친일 형사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 민족을 위해 며칠 동안만 눈감아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거금을 주며 만주로 떠나게 합니다. 친일 형사는 그동안 민족을 탄압하는 일을 했지만 이번에는 이 상황을 눈감아주고 계획대로 만주로 떠납니다. 하지만 훗날 이 사실이 밝혀져 친일 형사는 투옥 중 감옥에서 자살합니다. 



민족대표의 노력 중에는 이완용과 같은 친일파들에게 3.1운동 참여를 요청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행위에 대해 민족대표들의 상황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친일파들에게 다시 한번 자신들의 잘못을 돌이킬 기회를 베풀 수 있을 정도의 온건한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이 민족대표들이었던 것입니다.



다행이었던 것은 친일 형사나 이완용 모두 자신이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3.1운동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지 않은 것을 볼 때6) 그들에게도 아직은 작은 양심은 남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비록 민족대표들은 탑공공원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30대로 추정되는 한 청년이 나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학생들은 독립 만세를 외쳤고, 그 학생들은 종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행인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7) 이렇게 3.1운동은 민족대표의 바람과는 다르게 예정대로 진행된 것입니다.



만약 민족대표의 뜻대로 모두가 따랐다면 3.1운동이 지방이나 해외로 확산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3.1운동을 잔인하게 탄압한 일제의 만행을 해외에 알릴 기회도 없었을 것이며, 그 때문에 일제가 국제적 비난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뀌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의열투쟁이 불붙지도 않았을 것이며, 임시정부의 수립도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지만 ‘청년의 도전’은 역사를 바꿉니다.


1)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 6, 인물과 사상사, 2008, 158쪽
송시섭, 「3.1 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판결의 형사법적 의미-길선주에 대한 무죄판결을 중심으로」, 『법학연구』 30, 충남대학교 법학연구소, 2019.2, 291쪽
2) 김성보, 「우리역사 바로알자 3.1운동에서 33인은 ‘민족대표’가 아니다」,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89.11, 166쪽 
3) 박찬승, 「3.1운동기 서울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의 재구성-3월 1일과 5일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9.2, 71-72쪽
4) 박찬승, 「3.1운동기 서울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의 재구성-3월 1일과 5일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9.2, 72-73쪽
「태화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5) 김성보, 「우리역사 바로알자 3.1운동에서 33인은 ‘민족대표’가 아니다」,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89.11, 167쪽
6)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 6, 인물과 사상사, 2008, 145-146쪽
7) 박찬승, 「3.1운동기 서울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의 재구성-3월 1일과 5일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9.2, 82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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