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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결고리 Jul 25. 2023

청년 김마리아, #078 국권피탈과 교사 생활의 시작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청년 시절 읽기


#078 국권피탈과 교사 생활의 시작


 

김마리아의 청년 시절은 일제강점기와 함께 시작됩니다.


1910년, 김마리아는 19세의 나이로 정신여학교를 졸업합니다. 이때 김마리아를 포함한 졸업생은 모두 22명이었습니다. 몇 명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이들은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등 전국 각지에서 학업을 위해 고향을 떠난 당찬 여학생들이었고, 이들 중 일부는 김마리아와 같이 교사가 되거나 유학을 떠나 의사가 되고, 또는 훗날 항일 활동에 참여하면서 시대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1)


이들이 여성의 신분으로, 그것도 지금으로 치자면 고작 고등학생의 나이에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며 시대에 도전한 것은 지금의 여학생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는 여성의 학업 활동을 가정에서 순수하게 지원하기 보다는 좋은 집안과 결혼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즉, 여성은 ‘현모양처’로서의 적절한 수준의 교양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도전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 일본 유학을 떠난 여성들 대부분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공부는 좋은 데로 시집보내기 위한 것일 뿐인데 결혼할 나이의 딸을 굳이 유학까지 보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여학교를 다니면 행실이 나빠지거나 건방지게 되고 집안 살림살이는 모른 체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가족들의 반대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하여 허락을 받아낸 것입니다.2) 이렇게 뜻을 갖고 꿈을 개척해 가는 청년들의 도전은 언제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해 왔고, 김마리아의 도전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녀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광주의 수피아 여학교에 교사로 취직합니다. 그런데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김마리아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때 김마리아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아마도 정신여학교 시절 김마리아의 한 일화를 통해 당시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번은 국어시간 자유 주제로 작문을 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때 학생들 대부분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글을 썼지만, 김마리아는 일본 정부의 탄압상을 비판했다고 합니다. 일제의 야만적인 침략 행위를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글에 선생님은 놀라하면서도 한편으로 칭찬을 하였는데, 그 칭찬을 들은 김마리아는 ‘내 나라 내 주권을 찾아보겠다는 마음이 당연하다며 칭찬을 받으려면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경찰이 발견했다면 바로 처벌받았을 김마리아의 글 때문에 작문 시간에 나라의 상황에 울분을 토하거나 일제를 비판하는 학생들의 글은 점차 늘어났고, 이 때문에 학교가 탄압받을까봐 긴장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3)


국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청년 교사는 참담함을 느끼며 민족적 책임감을 더 강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수피아 여학교의 1회 졸업생이 6명으로 소수였기 때문에 교사와 학생의 친밀함 속에 교사들의 저항 의식은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김마리아가 떠난 이후에도 학교의 전통은 그대로 이어져 3.1운동 당시 수피아 여학교의 교사와 학생은 함께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를 끝까지 거부하여 폐교에 이르게 됩니다.4) 수피아 여학교는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출세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만 2년간 학생을 가르친 김마리아에게 1년간 일본 유학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짧은 기간 유학을 마친 김마리아는 이번에는 자신의 모교인 정신여학교의 요청을 받아 정신여학교의 교사가 됩니다. 유학을 다녀온 22세의 신여성은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의 진지한 학업 열정과 신앙심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시 김마리아와 동기 동창이며 교사로서 함께 근무했던 한 민족운동가는 김마리아의 교육 열정과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며 학교 기도실에서 눈물로 기도했던 모습을 인상 깊게 회고한 바 있습니다.5)


학교는 기본적으로 지식을 전수하는 곳이기에 유학을 다녀온 실력 있는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학생들 각자의 마음에 인생의 여운을 남기는 선생님은 아마도 시대의 문제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어떤 가치관을 갖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지를 조언하고 격려하며, 자신이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선생님이 아닐까요? 이것이 유학보다 청년 교사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1)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13쪽
2) 박정애, 「초기 '신여성'의 사회진출과 여성교육 : 1910~1920년대 초반 여자 일본유학생을 중심으로」, 『여성과 사회』11, 한국여성연구소, 2000.4, 54쪽
3)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18-119쪽
4) 「광주수피아여자중학교」,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이가연, 「호남지역 기독교 여학교의 3.1운동- 수피아여학교, 기전여학교, 정명여학교를 중심으로 -」, 『석당논총』74,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9, 89쪽
5)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28-130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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