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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결고리 Jul 06. 2023

청년 김마리아, #077 문화통치와 자본주의적 소비문화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시대읽기


#077 1920년대 문화통치와 저항,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와 출세욕


3.1운동은 일제의 잔혹한 무단통치가 실패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일제는 평화적인 3.1운동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진압하면서도 결국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낍니다. 또한 3.1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일본 국내의 민주화 분위기 등이 겹치자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대체하기로 합니다.


새로 부임한 조선총독은 종전의 헌병 경찰 제도를 보통 경찰제도로 바꾸었고, 한국인에 언론·집회·출판의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한국인의 차별을 개선하겠다고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짐작하듯이 문화통치는 포악한 식민 지배를 눈가림하기 위한 기만정책일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는 보통 경찰의 수와 예산을 급격히 늘려 한민족을 더욱 촘촘히 감시했고, 신문 등의 인쇄 출판물에 대한 검열도 오히려 강화했습니다.1) 또한 한국인에게 매질을 가했던 조선태형령은 폐지되었지만, 그 이후 자백을 얻어내기 위한 심문 과정에서 오히려 폭행과 고문이 강화되어 ‘문화통치’ 시기에 고문치사 사건이 언론에 종종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고문치사자의 연령별 분포에서 20~30대 청년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입니다.2) 이말은 문화통치기가 바르게 살고자 하는 청년들에게는 더 가혹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실질적으로 개선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1920년대 문화통치기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조선총독부가 주도적으로 친일파 양성 방침을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이 시기 일제는 대지주·자본가들과 결탁하고, 각종 친일 단체를 만들었으며, 지식인들을 광범위하게 설득 포섭하여 친일파를 형성하였습니다. 


김마리아와 같은 시기 일본에서 유학했고, 일본에서 2.8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대표적 청년 지식인 이광수가 조선총독부의 회유에 넘어가 3.1운동 참가자를 무지몽매한 야만인이라고 서술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것도 이때입니다.3)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3.1운동의 독립 기운을 이어갔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고, 만주에서는 의열투쟁 단체인 의열단이 조직되었으며, 만주의 독립군들은 봉오동 전투·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둡니다. 서재필이 있던 미국에서는 구미위원부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국내에서는 토산품을 애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 민족의 대학을 세우자는 민립대학 설립운동 등이 전개되며 여러 단체가 조직됩니다.


그러나 이런 민족의 독립 열기가 순탄하게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설립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무장투쟁, 외교활동, 실력양성 등의 독립운동 노선을 두고 서로 대립하였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일이 발생하자 대립은 극단으로 치닫게 됩니다. 1923년 임시정부의 분열 문제를 해결하고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지만, 이 회의는 결렬되고 독립운동 세력은 뿔뿔이 흩어져 임시정부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됩니다.4)


또한 만주에서는 그보다 앞서 봉오동 전투·청산리대첩에 복수하려는 일본군이 군인이 아닌 한국인 민간인을 상대로 무차별 학살을 벌인 간도참변을 일으켰고,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 운동 등의 국내 민족 운동 역시 일제의 방해 속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 속에 국내의 3.1운동 열기는 점차 식어갔고, 이런 상황에서 1920년대의 자본주의적 소비문화가 점차 확산됩니다. 그리하여 백화점, 호텔, 극장, 카페와 같은 근대적 소비 공간이 나타나 새로운 도시 경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사회지도층에 대한 일제의 회유는 계속되었고, 이들에게는 점차 식민지 상황이라는 민족적 위기보다는 사회적 신분 상승과 경제적 지위 획득이 더 중요하게 인식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청년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식민지 청년들은 신분 상승의 유일한 수단인 교육에 열을 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3.1운동을 기점으로 일제 설립의 관공립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중등·고등교육기관에서는 심각한 입시난이 발생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지속된 학구열로 학생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우승열패 사상이 주입되었고, 학생들은 ‘힘·실력’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는 현실을 수용하게 됩니다.5)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여성 청년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층이었던 신여성이 활동하던 때였는데, 이들은 1910년대 일본 유학을 중심으로 서구 문물을 수용한 후 1920년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들은 여성의 총명함이 외모를 통해 발현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들의 세련된 서양식 외양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복을 착용하는 대다수의 여성들과 외향적으로 구분되는 이들은 사회의 주목을 받았고, 새로운 도시 문화를 주도했기 때문에 모던 보이에 대비되는 ‘모던 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6)


물질주의적이고 출세를 지향하는 식민지 조선에서 한국인 청년들은 독립 운동, 현실 외면, 친일 행위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인생을 선택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특히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여 주목받았던 신여성 청년들은 보통의 일반 여성보다 더 많이 가졌고, 더 많은 지위를 누렸기 때문에 일제의 간교한 유혹과 물질주의적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에 타협한 신여성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청년 김마리아는 그들과 달리 민족을 위한 길을 선택했고, 끝까지 그 신념을 지킵니다. 이제 청년이 시대적 역경에 도전했던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문화통치」·「보통경찰제」,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2) 변은진, 「신문 기사를 통해 본 일제 ‘문화통치기’ 고문치사 사건(1920~1936)」, 『남도문화연구』 47호, 남도문화연구소, 2022.12, 41쪽
3) 한국근현대사사전, 「친일파 양성정책」, 『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 네이버 지식백과 
「민족개조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최주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재고」, 『인문논총』 70,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3, 257쪽
4) 박찬승, 「임시정부, 리더십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 『한국독립운동사:해방과 건국을 향한 투쟁』, 역사비평사, 2014, 네이버 지식백과
5) 권영민, 「일제강점기 학교관 형성 연구」, 『한국교육문제연구』 39, 중앙대학교 한국교육문제연구소, 2021.12, 13-15쪽
6) 이경규, 「일제강점기 신여성과 일본유학에 관한 고찰」, 『일본근대학연구』58, 한국일본근대학회, 2017, 223-224·227-228쪽
「모던 걸」,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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