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제1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전 지구적인 전쟁이며, 총력전의 개념이 확립된 전쟁입니다.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역사에 미친 영향도 상당했습니다. 국가에 속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이 총동원된 전쟁은 당시까지 전쟁에 의한 가장 큰 인명 피해를 초래했고, 이러한 비이성적 행위는 예술계에서 큰 충격을 주어 전통 가치에 도전하는 예술 파괴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여성의 지위 상승, 유럽의 쇠퇴와 미국의 부상, 러시아혁명과 사회주의의 확산, 민족자결주의의 대두 등의 역사적인 변화도 가져왔습니다.
20세기 초에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은 그 이전에 있었던 전쟁들과는 규모와 기술, 속도 등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산업화’된 총력전이었습니다. 총력전이라는 말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참모장으로 활용했던 장교가 저술한 『총력전론』에 의해 널리 쓰이게 된 개념으로 전선과 후방의 구분이 사라지고 권력층이나 군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하나가 되어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총력전에서는 국민국가, 징병제, 기술발전, 산업화 등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었고, 군사력만으로는 전쟁 수행이 어려웠기 때문에 전국토의 전장화·전국가의 병영화가 총력전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
산업화를 바탕으로 기관총, 탱크, 잠수함, 독가스 등 인간을 죽이기 위한 무기가 개량되고 신무기가 대량 생산되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전쟁에 동원된 7,400만 명의 병사들 중 1,500일 이상의 기간 동안 매일 6,000명이 죽어나간 전쟁 통계는 이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의 인명 피해였습니다.2)
수천만 명의 사상자 발생으로 남겨진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아픔과 증오를 겪어야 했고, 전쟁 수행을 위한 적자 재정 정책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여 삶은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이런 비윤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상황을 초래한 인간의 만행에 많은 지식인과 예술인은 큰 충격을 받았는데, 이들은 저항의 의미로 기존의 예술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예술 운동을 일으킵니다. 다다이즘(dadaism)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다다(dada)라는 말은 그저 특별한 의미 없이 발음하기 편한 의성어를 의미하며 그 이름에서 비이성적, 반문화적, 허무주의적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다이즘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은 과거 예술의 기준이 되는 심미적 가치를 부정했기 때문에 콜라주 기법 등을 활용해 정부의 위선, 매춘부와 같은 성직자, 돼지와 같은 산업 자본가 등을 파괴적이고 기괴한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3) 그만큼 제1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비이성, 잔혹성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총력전의 상황에서 여성이 전쟁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여성들 자신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킬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전 여성들은 대외적인 노동에서 배제되었으나 유럽의 남성들이 군인이 되기 위해 농장과 공장을 떠나면서 노동력 구성이 바뀝니다. 독일에서 전쟁이 끝날 무렵 중공업에 종사하는 노동력의 3분의 1은 여성이었고, 프랑스에서는 군수산업 분야에서만 68만 4,000명의 여성이 일했습니다. 또한 영국에서 ‘군수산업 여공들’이라고 불리던 여성의 숫자는 거의 100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중간계급 여성은 종종 전쟁이 자신의 삶에 가했던 제약들을 없애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여성들은 이제 ‘임신’이나 ‘매춘’이란 단어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흡연하는 단발머리의 ‘신여성’은 새로운 문화적 변화의 상징이 됩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퇴역 군인인 남성들에게 일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여성을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여파로 여성은 치솟는 물가 속에 과부로 지내거나 친척을 돌보는 등 더 많은 벌이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4)
이로써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대외적으로 인정되었고,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1918년에, 미국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20년에 여성참정권이 보장됩니다. 이는 여성사의 관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진전이었습니다. 1893년 뉴질랜드에서 세계 최초로 여성참정권이 보장된 이래 유럽의 주요국에서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다가 두 강대국에서 드디어 여성참정권을 보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짐작하듯이 여성의 지위가 단번에 획기적으로 개선될 만큼 그 기회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근대를 상징하는 프랑스 혁명이 1789년에 일어나고 이때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주장되지만, 프랑스의 여성참정권 보장은 그로부터 150여 년이 지난 1946년에 실현되듯이 제1차 세계대전 후 여성의 참정권 인정은 일부 국가에 한정되었고, 한국(1948년)·중국(1946년)·일본(1945년)의 사례처럼 이러한 변화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것은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을 때까지 더디게 진행됩니다.5)
1) 「총력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총력전」, 21세기 정치학 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2) 주디스 코핀 외,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 하, 소나무, 2021, 521쪽
3) 오병욱, 「1차 세계대전과 다다이즘」, 『대한토목학회지』 55, 대한토목학회, 2007, 76·81쪽
4) 주디스 코핀 외,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 하, 소나무, 2021, 503-504쪽
5) 김은주, 「[김은주의 시선] 여성 참정권이 걸어온 길」, 연합뉴스, 2017.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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