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식민 통치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무력에 근거한 무단통치를 실시합니다. 당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투쟁을 이어가야 했고, 19세의 나이로 교사가 된 김마리아는 식민지 조선에 남아 현실을 견뎌야 했습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제는 무단통치 기간 다양한 방식의 민족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먼저는 통감부를 대신하여 식민지 최고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했습니다. 조선총독은 천황을 대신하여 한반도의 최고 지배자가 되는데, 천황에 직속되었기에 일본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으며, 육·해군 대장 가운데 선임되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선총독에 부임한 이들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의 침략 행위에 직접 연관 되어 있었고, 일부는 일제의 패전 후 A급 전범(국제조약을 위반하여 침략전쟁을 기획, 시작, 수행한 범죄자)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받기도 했습니다.1) 이것은 일제의 식민 행위가 군국주의적 침략을 근본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단통치의 근간은 헌병경찰제도였습니다. 헌병은 군사경찰로 군대 내의 질서유지나 법률 위반을 담당하는 군인인데, 이들에게 군인이 아닌 일반인 상대의 경찰업무를 맡긴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군인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치안을 담당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독재시기에 흔히 있었던 계엄령입니다. 따라서 헌병경찰제도는 침략국에 의해 계엄령보다 더욱 공포스럽고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 행해진 무력 통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헌병경찰에게는 즉결심판권이 부여되었습니다. 이것은 정식 법절차나 재판을 거치지 않고 처벌을 할 수 있는 권한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을 대상으로 자의적인 처분이 행해졌습니다. 이들이 내릴 수 있는 처분에는 신체에 직접 매질하는 전근대적인 태형이 포함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인에게만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일제의 통치 행위는 매우 차별적이며, 야만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국권피탈 이전에 경찰권과 사법권은 이미 빼앗겼으므로 일제의 통치에 합법적으로 저항할 방법은 없었습니다.2)
무단통치 시기 교육에서의 민족 차별도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갑오개혁 시기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기관은 소학교였습니다. 일제는 을사늑약 체결 이후 소학교의 명칭을 보통학교로 바꿉니다. 갑오개혁 이후 사용되던 ‘소(小)’학교라는 명칭은 자연스럽게 소·중·대라는 상급학교 계열을 연상시킵니다. 반면 보통학교는 상급학교의 예비학교가 아니라 초등교육 수준의 보통학교 졸업으로 조선인의 교육을 종결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교육령을 통해 한국인에 대한 교육방침을 정했는데, 무단통치 시기에 발표된 1차 조선교육령은 우민화 교육정책으로 불리는 것으로 일본어 보급을 최우선으로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인을 일본의 충량한 국민으로 만들며, 한국인의 노동력 착취를 위해 실업교육에 초점을 맞춘, 전혀 ‘교육적’이지 않은 교육방침이었습니다.
이런 의도 때문에 1910년대 보통학교는 대부분 4년제 간이 실용 학교였으며, 일본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의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한국인 역시 일제의 교육 의도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립보통학교의 수는 그다지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 당시 한국인의 보통학교 취학률은 2~3%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3) 반면 일본은 19세기 말 4년제 소학교의 취학률은 70%에 이르렀고, 1910년대 이르면 100%에 육박하게 됩니다. 또한 1907년, 의무교육 연한이 6년으로 늘어나기도 합니다.4) 이로써 무단통치 시기 일본은 조선의 우민화 교육 목표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단통치 시기 일제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한반도에 대한 경제적 약탈이었으며, 그 대표적인 정책은 토지조사사업이었습니다. 일제의 전국적인 토지조사로 수백만의 농민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소작인·화전민·노동자로 전락한 반면, 조선총독부는 전 국토의 40%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이를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일본 토지회사, 일본 이민자들에게 무상 또는 싼값으로 팔아넘겼기 때문에 일본인 대지주가 출현하게 됩니다.5)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국인 지주보다는 자기 땅을 농사짓는 힘 없는 농민의 토지가 일제의 토지 약탈 대상이었다는 점입니다.6) 사람들 사이 신분제는 사라졌을지는 몰라도 경제적 지배, 피지배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고, 한국인 지주뿐 아니라 식민 통치를 바탕으로 새롭게 등장한 일본인 지주의 억압 속에 대다수 한국인의 삶은 처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외에도 조선총독부는 어업령, 산림령, 광업령 등을 제정하여 한반도의 각종 이권을 약탈하였고,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회사를 설립할 수 있는 회사령을 제정하여 한국인의 근대적 회사설립까지도 막았으므로 한국인 자력으로 경제적 성장을 달성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무단통치의 가장 근본적인 탄압은 바로 한국인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한 것입니다. 이들 자유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현재의 헌법에 보장된 매우 중요한 권리입니다.
언론이란 개인의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표현된 말이나 글은 서로 간의 의견을 교환하거나 공감하는 수단이 될 것이고, 이것이 좀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으면 ‘여론’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언론은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해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부당하다고 느끼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점을 입 밖에 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애초에 상황 개선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면서 낙후된 조선을 ‘발전’시킨다는 일제의 선전은 처음부터 모순일 수밖에 없었고, 이런 의미에서 근대적인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는 그저 전근대적인 정체기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부당함을 알리는 개인의 말이나 글이 허용된다 해도 그것이 일회성 행위로 그친다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출판이라는 수단이 필요합니다. 출판은 인쇄하여 ‘세상에 내놓는 행위’, 다시 말해 자신의 글을 대외적으로 제공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판이 보장된다면 인쇄된 글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은 지속적으로 공표될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출판물은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쌍방향으로 좀 더 구체적인 생각을 교류하기 위해서는 집회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임을 통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에 도전하는 동력을 얻고,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논의할 수 있게 됩니다. 이상에 머물던 생각이 집회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하루 아침에 개선되지 않을 것이고, 길게는 수십 년을 소요하면서 다양한 장애를 마주치게 됩니다. 그 기간을 견디지 못하면 아마도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도전은 실패로 끝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사그라지지 않도록 언론·출판·집회의 모임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한 주체가 조직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체가 결사입니다. 독립신문이라는 출판물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고, 한국 최초의 근대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최종적으로 정부 정책을 수립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은 모두 독립협회라는 결사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는 세상을 바꾸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권리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청년들조차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기까지 언론·출판·집회·결사를 자연스럽게 경험해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정치인이 아니라면 이것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불의한 세상에 도전하고 싶다면 먼저는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글을 작성하여 대외적으로 알리고,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세상을 바꿀 단체를 조직해야 합니다. 그런 후 다양한 방식의 대중 집회를 조직하여 행동한다면 세상에는 분명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20세기의 역사에서 이것이 억압되었던 때는 부정한 권력을 강압적으로 유지하고자 했던 일제강점기와 독재 시기였다는 점을 세상에 도전할 청년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일제는 조선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조선을 발전시키기 위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억지 명분을 주장했고, 지금까지도 일본 우익 정치인이나 한국 친일파들은 그런 논리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무단통치 시기의 탄압·차별·착취·억압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들의 주장은 고려할 가치가 없는 허무맹랑한 거짓일 뿐입니다. 이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비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서민교, 「미나미 지로」, 『일본 군인』, 일본사학회·세손출판사, 네이버 지식백과
2) 「무단통치」·「헌병경찰제」·「조선태형령」,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조선교육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권영민, 「일제강점기 학교관 형성 연구」, 『한국교육문제연구』39, 중앙대학교 한국교육문제연구소, 2021.12, 6쪽
4) 마리우스 B. 젠슨, 『현대일본을 찾아서』2, 이산, 2013, 817-818쪽
5) 「토지조사사업」,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6) 강만길, 『고쳐쓴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1996, 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