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전근대 시기 남녀의 평등한 관계를 이야기할 때 주로 고려시대를 언급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여성이 호주가 되거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부모로부터 재산을 동등하게 분할받거나 제사를 주관할 수 있었으며, 이혼 후 재혼도 가능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려 후기 한 관리가 일부일처제를 버리고 첩을 둘 수 있게 하자고 왕에게 건의했다가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일이 있었는데, 당시 재상 중에는 아내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의 건의는 실현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여성의 지위가 낮지 않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에서의 상황이며, 사회적으로는 남성이 지위를 독점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잘 알려지다시피 유교적 관념에 따라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했는데, 삼종지도(三從之道,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 열녀(烈女, 남편이 죽은 후 홀로 살거나 위급 상황에서 정조를 지킨 여자), 칠거지악(七去之惡,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함·아들을 낳지 못함·부정한 행위를 함·질투 함·유전병이 있음·말이 많음·훔침 등 여성을 쫓아낼 수 있는 7가지 상황)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시대를 앞서간다는 조선 후기 실학자조차도 ‘여자들은 남녀칠세부동석과 삼종지도만 지키면 되지 독서는 뭐에 필요하냐’는 주장을 했습니다.1)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는 대략 조선 중기까지 이어지다 조선 후기가 되면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더욱 심해집니다. 여자는 결혼 후 시집살이를 해야 했고, 호적에는 나이순이 아닌 남자를 먼저 기재하게 되고, 가문에 남자가 없는 경우 양자를 들여 재산을 물려주고, 제사를 받들게 했습니다.
조선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족보는 부계 중심의 혈연관계를 보여주는 문서로써 여기에 여성은 자신의 이름으로 지칭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자신의 이름 대신 남편이나 부친의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2)
그런데 개화기가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여성 교육기관이 설립되고,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등장하여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여성 운동이 전개됩니다.3)
하지만 아쉽게도 이 시기의 여성상은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고, 남성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려야 한다는 파격적인 여성상도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 여성은 신사임당의 여성상과 같이 여전히 자녀의 교육자이자 남편을 돕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여성이 근대적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도 단지 남성을 위한 여성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동아시아 국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고, 이렇게 ‘현명한 어머니와 어진 아내’라는 근대적 여성상을 한국에서는 현모양처, 일본은 양처현모, 중국은 현처양모라고 불렀습니다.4)
이런 이유로 여성에 대한 근대교육이 시작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여성의 지위가 바로 상승되거나 사회적 차별이 개선되지는 못했습니다.
188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 설립되는 시기였습니다. 사립기관인 원산학사나 공립기관인 육영공원이 그것인데, 이들 기관은 시대를 이끄는 신지식인 양성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 구조 속에서 출세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역할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출세의 대상은 당연히 남성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기관은 1886년 미국 여성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이화학당입니다.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한국의 여성 교육 차별 문제를 한국의 남성이 아닌 ‘여성 선교사’가 최초로 개선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화학당은 설립되었으나 학교 운영은 쉽지 않았습니다. 양반집에서는 내외가 심해서, 가난한 집에서는 일손 문제로 학생을 내놓기 어려웠고, 외국인이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이상한 소문도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화학당의 개교는 학생 단 한 명으로 출발했습니다.
첫 학생은 양반 가문으로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을 맡겠다는 야심이 있었으나 병으로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두 번째 학생은 너무 가난해서 맡긴 10살 아이였고, 세 번째 학생은 콜레라에 걸려 성 밖에 버려진 4살 아이였습니다. 네 번째 학생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외국 선교사 돕는 일을 하는 관계로 아이를 맡기게 되고 훗날 미국 유학을 가 한국 최초 여자 의사가 된 박에스더였습니다.
여학생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학생들이 도망치기도 했기 때문에 이화학당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 교복이 탄생합니다. 그 교복색은 눈에 잘 띄는 붉은 색이었는데, 이 색이 당시 당상관(3품 이상의 고위 관직자)의 관복 색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양반 사회에 논란이 되어 교복 색을 바꾸는 일도 있었습니다.5) 여성 교육의 출발 과정은 이렇게 어려웠습니다.
여성 교육이 점차 확대되자 1900년대의 근대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교육 기회의 요구, 경제적 독립, 직업과 사회 활동의 필요 등을 내세워 기존의 전통적인 여성과 차이를 보입니다. 그리고 1920년대에 이르면 자유연애와 여성해방 문제를 공론화하기까지 합니다. 이 시기가 되면 남성 지배의 가부장 제도와 결혼제도를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민족 해방을 위해 헌신하려는 여성이 등장하게 됩니다.6)
이시기 신분 상승을 위해 여성이 택하는 방법 중 하나는 유학이었는데, 지리적 이점과 식민지 상황 때문에 여성들은 주로 일본 유학을 떠났습니다. 유학은 비용 문제나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으로 극히 소수 여성만 가능했기 때문에 여성 유학생은 당대 최고 엘리트 신여성으로 주목받게 됩니다.7)
신여성의 사회경제적 배경은 대다수의 일반 여성이 누리지 못했던 부유한 환경이었고, 그들은 그들과 마찬가지의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배우자와 결혼하여 근대적인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일반 여성들보다 사회를 바꿀 힘이 있었지만,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안주하거나 더 나아가 적극적인 친일 행위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8) 이들의 행태는 서양 명문 가문의 여성들이 여성참정권 운동에 반대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을 모두 그들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면 안 됩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사회 구조를 조성하여 강요한 것은 남성 기득권층과 일제이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환경에서 근대교육을 습득한 신여성조차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어렵다면, 평범한 청년 여성이 가부장적 질서와 민족적 차별 속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과 민족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훨씬 어려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 김마리아의 도전이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1) 정경환, 「제4장 김마리아의 구구투쟁과 독립정신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7, 한국민족사상학회, 2013.12, 108쪽
2) 권기석, 「조선시대 족보의 女性 등재 방식 변화 -여성의 夫家 귀속과 다원적 계보의식의 축소-」, 『조선시대사학보』90, 조선시대사학회, 2019.9, 46쪽
3) 「신여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4) 「현모양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5)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 2, 인물과 사상사, 2007, 70-72쪽
박성희, 「[금요칼럼]박성희/뉴스와 루머 사이」, 동아일보, 2004.5.6.
6) 이경규, 「일제강점기 신여성과 일본유학에 관한 고찰」, 『일본근대학연구』58, 한국일본근대학회, 2017, 225쪽
7) 박정애, 「초기 '신여성'의 사회진출과 여성교육 : 1910~1920년대 초반 여자 일본유학생을 중심으로」, 『여성과 사회』11, 한국여성연구소, 2000.4, 53쪽
8) 김광규,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조선인 유학생 연구」, 『한국교육사학』43, 한국교육사학회, 2021, 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