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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결고리 Apr 07. 2023

청년 김마리아, #070 여성 항일 운동, 고문, 망명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주요 업적과 생애 요약


#070 여성 항일 운동, 고문, 망명, 귀국


1919년, 유학에서 돌아온 28세의 청년 김마리아는 제일 먼저 여성 항일 단체 조직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납니다. 


당시 일제는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갔는데, 이때 김마리아도 여성 항일 단체 조직을 논의한 혐의로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습니다. 이때 생긴 고문의 후유증으로 김마리아는 코와 귀에 고름이 차는 병이 생겨 평생 심한 두통과 신경쇠약증을 겪게 됩니다.1)


가석방된 김마리아는 고문으로 몸이 성하지 않았음에도 침체된 국내 여성 항일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다시 조직하여 회장으로 추대됩니다.


일제의 잔인한 탄압을 경험한 사람이 두려움 없이 바로 독립운동의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짊어졌다는 점에서 민족을 위한 청년의 강한 신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김마리아의 단체 조직 역량은 매우 뛰어나 해외에까지 지부를 설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거액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합니다.2) 하지만 조직의 성장도 잠시, 김마리아는 변절자에 의해 지도자라는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게 됩니다.


그 변절자는 애국부인회의 이전 회장인 오현주로,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함께 민족을 배신하기로 작정한 후 비밀리에 새로 조직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정보를 일제에 팔아넘깁니다. 


배신자의 밀고로 김마리아는 다시 체포되었고, 더 가혹한 고문을 받게 됩니다. 이전의 후유증에 무차별 폭행이 이어지자 김마리아는 위중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당시 일제는 3.1운동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이미 국제적 비난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므로 김마리아까지 고문으로 죽는다면 일본의 평판은 더욱 악화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재판이 종결될 때까지 외부인과의 만남을 차단하는 조건으로 김마리아를 병보석으로 석방합니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이후에도 병세는 호전되지 않아 폐인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렀고, 재판 결과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여성계의 대표자인 김마리아를 죽게 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비밀 요원을 파견하여 그녀를 상하이로 망명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때가 1921년, 김마리아가 30세가 되는 해였습니다.3)


김마리아의 망명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고, 중국 망명 당시에도 여러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청년은 이를 극복하고 다시 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국회의 전신인 임시의정원 최초의 여성 의원이 됩니다.


그런데 김마리아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조직된 지 겨우 4년 만에 혈연·지연·학연·이념 등으로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고, 분열을 해소하고자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개회했으나 회의는 결렬되어 독립운동 세력은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독립운동가들의 분열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결과가 이렇게 되자 32세의 청년 김마리아는 안타까움을 안고 미국으로 제2의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4)


미국에 도착한 그녀는 파크 대학, 시카고 대학, 콜럼비아 대학의 사범대학원, 뉴욕 신학교 등에서 공부하며 조국에 봉사할 준비를 이어갑니다. 당시 중국 여권을 가지고 망명했기 때문에 인종차별을 겪었지만, 김마리아는 온갖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노동과 학업을 병행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디를 가든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그런 의지를 바탕으로 미국에서도 항일 여성단체인 ‘근우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됩니다.


극심한 고문으로 생을 오가는 끔찍한 경험을 겪었지만, 민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으로 고국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그녀의 신념은 처음부터 한결같았습니다. 하지만 재판 중 망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10년이라는 선고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립니다.5) 


그리고 1932년, 망명 12년 만에 41세의 나이로 귀국의 뜻을 이룹니다. 그녀는 일제의 감시 속에 거주지 제한을 받으면서도 원산의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의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을 이어갔고, 여성단체인 장로교 전국 여전도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맡아 농촌 계몽에 힘씁니다.6)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종교 단체에 신사참배를 폭력적으로 강요했는데,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서양 선교사를 교장에서 파면·추방하고 학교를 폐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천주교는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므로 그 참배를 허용한다’라고 발표했고, 그 뒤를 이어 감리교, 성결교, 장로교 등 교단 차원에서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황국신민이 가져야 할 마땅한 국민의례에 불과하다’라는 총독부의 발표를 수용하여 신사참배에 굴복하게 됩니다. 게다가 평양의 주기철 목사와 같이 신사참배 거부를 주도한 경우, 교단 차원의 결의로 목사직에서 파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7)


하지만 김마리아는 공식적인 모임을 회피하거나 모임을 정식 진행하지 않고 신사참배 전에 산회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신사참배 거부 투쟁을 감행합니다.8) 당시 각 종교 단체는 교단 차원에서 이미 변절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념을 지킨 김마리아 개인의 투쟁은 더욱 빛났습니다.


한국 여성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 온 김마리아는 고문 후유증과 긴 망명 생활 때문에 건강이 좋지 못했습니다. 김마리아가 52세가 되던 1943년, 그녀는 잠자리에 들기 전 화장실에 갔다가 졸도하여 중태에 빠지게 됩니다. 한 달 정도 지난 뒤 의식이 회복되었지만, 몸은 더욱 불편해졌고, 입원했으나 건강은 회복되지 못한 채 광복을 1년 남긴 1944년, 53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합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라는 스스로의 말을 증명하듯 그녀의 유골은 유언에 따라 화장 후 대동강에 뿌려집니다.


민족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그녀의 삶이야말로 존경받아 마땅한 이 시대의 진정한 여성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청년의 도전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정경환, 「제4장 김마리아의 구구투쟁과 독립정신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7, 한국민족사상학회, 2013.12, 111-112쪽
2) 정경환, 「제4장 김마리아의 구구투쟁과 독립정신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7, 한국민족사상학회, 2013.12, 112쪽
3) 정경환, 「제4장 김마리아의 구구투쟁과 독립정신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7, 한국민족사상학회, 2013.12, 112·114쪽
4) 정경환, 「제4장 김마리아의 구구투쟁과 독립정신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7, 한국민족사상학회, 2013.12, 116-119쪽
5) 정경환, 「제4장 김마리아의 구구투쟁과 독립정신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7, 한국민족사상학회, 2013.12, 116-119쪽
6) 정경환, 「제4장 김마리아의 구구투쟁과 독립정신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7, 한국민족사상학회, 2013.12, 120쪽
7) 박용규,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운동: 역사적 개관」, 『신학지남』, 신학지남사, 2000, 192·198-199쪽「주기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8) 정경환, 「제4장 김마리아의 구구투쟁과 독립정신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7, 한국민족사상학회, 2013.12, 121-122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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