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김마리아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1892년 황해도 송천리에서 태어납니다. 그녀가 태어난 황해도 송천리는 신돌석이 활동했던 경북지역과는 달리 일찍부터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은 곳이며, 개화기에 주체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설립된 곳이기도 합니다. 소래교회에서는 교회 부설로 신교육을 위한 학교가 설립되었기 때문에 서양 선교사가 세계정세와 문물 등을 남녀 모두에게 가르쳤습니다.1) 그 때문에 양반·평민, 남성·여성에 대한 차별의식을 극복한 지식인들이 배출될 수 있었는데, 김마리아도 이곳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김마리아의 아버지는 김마리아가 3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는 14세가 되던 해에 목숨을 잃습니다. 그래서 김마리아는 언니 2명과 함께 고향을 떠나 작은아버지들이 있는 서울로 이주합니다. 그리고 15세의 나이로 언니들과 정신여학교를 다니게 됩니다.2)
당시 작은아버지들은 세브란스병원 건너편에 김형제상회를 차리고, 한편으로는 국권회복운동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민족운동으로 상회에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회 경영을 지배인에게 전적으로 맡겼는데, 그 때문에 지배인이 이익을 빼먹어 경영상태가 악화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적 상황이 노골화되고 있었던 상황이므로 김마리아의 작은아버지들은 상회 운영보다는 국권회복운동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형제상회의 2층은 애국계몽운동 중에서도 신민회 활동의 중심지로 활용이 되었는데, 이곳은 안창호를 비롯한 각처의 민족지도자들이 연락하고 모이는 거점이 되었습니다. 김마리아는 작은아버지들의 민족 운동을 직접 눈으로 보며 성장했기 때문에 그녀도 자연스럽게 작은아버지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3)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어 서울에서 일본군과 해산군인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을 때 부상당한 병사들은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았는데, 당시 김마리아의 작은아버지와 그의 집에 함께 머물고 있었던 안창호는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부상당한 해산군인들을 살리기 위해 힘씁니다. 이때 정신여학교 학생들도 구호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데, 목숨을 잃은 대한제국의 군인이 200여 명이나 되는 참혹한 상황에서 부상병들을 도운 16세의 김마리아는 분명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4)
1910년 6월, 19세의 김마리아는 정신여학교 졸업 직후 큰언니가 있던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합니다. 그런데 그해 8월 29일 대한제국의 국권은 강탈되고 다음 해, 105인 사건이 일어나 신민회는 해체됩니다. 105인 사건은 독립운동 탄압을 위해 일제가 조선총독 암살미수사건을 확대·조작하여 160여 명의 민족운동가 중 최종적으로 105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내 최대 비밀 결사였던 신민회는 큰 타격을 입었고, 당시 신민회의 회장이었던 윤치호는 이후 대표적인 친일파로 전향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했는데, 김마리아의 작은아버지도 세 자매를 남겨두고 북만주로 망명하게 됩니다.5)
이런 상황에서도 김마리아는 배움을 멈추지 않고 21세가 되던 해에 일본 유학을 떠나 1년 만에 귀국 한 후, 24세에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이곳에서 김마리아는 고모의 뒤를 이어 여학생 친목회의 회장이 되어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여성계(女性界)』라는 잡지를 발간합니다. 당시 일본에서 약 3백 명가량의 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을 때 이들은 주로 남학생 위주의 친목회를 조직하여 활동했기 때문에 김마리아의 활동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6)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활동을 하던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 생활 중 처음으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1919년 도쿄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원칙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입니다. 당시 식민지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킨 이 소식을 일본에 있던 유학생들이 한국보다 먼저 알게 되면서 청년 유학생들은 3.1운동에 앞서 독립선언을 먼저 준비하게 됩니다.
김마리아는 여성친목회 회장으로서 독립선언문 인쇄 자금 등을 헌납하면서 2.8독립선언에 깊이 관여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은 모두 남자였습니다.7)
됴쿄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여성친목회 회장이었던 김마리아는 처음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습니다. 하지만 김마리아는 이런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2.8독립선언 상황을 국내에 알리려는 뜻을 품습니다. 일본에서 졸업을 앞둔 상황이었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일본인으로 변장한 채 2.8독립선언서를 숨겨 귀국한 김마리아는 국내에서 본격적인 항일 운동을 전개합니다.8)
1)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21·26·53쪽
2)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490-491쪽
3)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66·67·69쪽
4)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74-76쪽
5) 「105인 사건」,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26-127쪽
6)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27-128·131·136·138쪽
7)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45-146쪽
8) 정경환, 「제4장 김마리아의 구구투쟁과 독립정신에 관한 연구」, 『민족사상』 7, 한국민족사상학회, 2013.12, 111쪽
사Ⅳ